쇠소깍, 검은여, 제주올레여행자센터
의도하지 않게 많이 걸어 1코스의 감흥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나서 반성을 한 다음에는, 아예 처음부터 30km 정도를 걷는 것으로 계획을 세워 걷고 있다. 시간이나 속도에 여유를 가지고 크게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4~5시 이전에는 숙소에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대략 26km 정도 되는 5, 6코스 길을 걸었다.
남원에서 시작하는 5코스 구간부터는 멋진 풍경을 보면서 가족들과 여유롭게 산책하며 걷기 좋은 길이 이어진다.
큰엉 앞뒤로 걷게 되는 바다 절벽 위 숲 속 산책길은 아름답다고 소문이 많이 난 길이기도 하지만 투명한 하늘에 오전의 찬란한 햇살이 더해져 반짝이는 잎새 사이로 보이는 바다와 큰 바위들이 더 없는 경관을 보여준다.
그래서 관광객들이나 인근 숙소에 묵으며 산책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된다.
아이들과 함께 걷는 부모들은 예쁜 풍경을 보지 못하고 장난만 치며 가는 아이들에게 “뛰지 말고 여기 좀 봐, 저기 너무 예뻐.”라고 연방 말을 하지만 지들끼리 놀리며 찧고 까부느라 정신이 없는 아이들에게 엄마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걸음이 불편한 노모를 모시고 천천히 걸어가는 중년의 부부에게서 따뜻한 정을 느끼다가, 지나쳐 가는 나의 걸음이 불편을 만들지 않을까 조심하며 지나친다.
나무와 숲 덤불 사이로 뚫린 공간이 한반도 국토 모양을 만들어 지나는 사람들마다 사진으로 담아간다.
위미 동백나무 군락지를 지날 때는 나무 그늘 평상에 할머니들이 나와 환히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는 것이 보기 좋아 안녕하시냐고 인사를 하면서 지나쳤는데, 큰 동백나무에 시선을 뺏겨 갈 길을 놓치고 잠시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할머니들께서 그리로 그냥 가면 된다고 소리 질러 알려 주신다. 마을 길을 지나가며 주민들을 만나거나 노인분들을 지나치게 되면, 그들의 일상을 조금이라도 어질러놓는 여행자의 최소 예의라고 생각하고 가볍게나마 목례를 하거나 안녕하시냐는 인사를 하곤 하는데, 이게 상대방뿐 아니라 내 마음도 기분 좋게 만드는데, 오늘은 이런 도움도 받는다. 감사하다고 큰소리로 인사드리고 길을 빠져나간다.
위미항은 지날 때까지 잘 알지 못하던 항이었는데 그 규모가 상당해 방파제 안쪽의 항이 시원한 맛이 있다. 낚시가 잘 되는 곳인지 방파제 끝 쪽에는 낚시하는 사람이 여럿 보이는데, 지나가면서 보기에는 참 여유롭고 편안해 보이는 풍경이다.
이어지는 바닷가 길을 걸어 도착한 쇠소깍은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서 만들어낸 풍경 중에서도 제일로 꼽을만한 경치를 자랑한다. 소가 누워있는 형상이라 쇠소깍이라 불려졌다고 하는데, 가뭄이 계속되는 중이라 물이 적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는데,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말하듯 푸른 물의 풍부한 수량을 보여준다. 참 여러 번을 와 봐도 기암괴석과 짙푸른 물이 만드는 절경에 항상 감탄을 하게 된다.
이름난 관광지답게 가족, 연인, 친구들 각각의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배를 타고 간식을 먹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관광지의 번잡함을 즐기지 않다 보니 쇠소깍에서 배를 타 본 적이 없었는데, 다음엔 가족들이랑 한번 타 봐도 좋을 것 같다는 기약을 해 본다.
사람이 많은 곳을 살짝 지나 전망 좋은 카페를 찾아 들어가 감귤 주스를 한잔 시켜 마시며, 신발을 벗고 오전을 잘 걸어온 발을 식혀준다.
걸을 땐 가면서 보게 되는 것과 풍겨오는 냄새, 부딪혀 오는 바람 그리고 발에 전해지는 감촉 등으로 뿌듯함이 충만한 상태를 만끽하는데, 이렇게 푹신한 자리에 기대어 쉬게 되면 다른 감정의 행복함이 안락하게 밀려온다.
날씨가 지나치리만큼 화창한 데다 바람도 살짝 불어주어 하늘과 바다가 한 빛으로 너무 반짝이는 날인 데다 차를 타고 가다가도 세우고 보고 갈만한 뷰포인트들이 많이 있는 해안길을 걷게 되니 기분도 상쾌하고 흥이 절로 나는데, 게우지코지에서의 풍경은 그중에서도 압도적인 맛이 있다.
섶섬이 손에 잡힐 듯이 보이는 제지기오름을 지나 검은여를 지날 때는 앞에 보이는 주상절리 절벽을 참 멋있게 솟아 있다고 생각하면서 걸었는데, 그 주상절리 언덕 위에서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니 검은여와 그 옆으로 걸어 지나온 푸른 길이 천국 같은 평온한 느낌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길은 이렇게 돌아서 봐야 그 진면목을 보여 줄 때가 많다. 우리네 삶도 그렇듯.
소라의 성을 지나면서는 ‘이제 다 왔네’ 하는 생각을 했는데 이렇게 긴장을 놓으니 서귀포 시를 들어와서는 훤히 아는 길을 자꾸 놓치게 된다.
정방폭포를 거쳐 서복 불로초 공원을 지나게 되는데, 이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조성된 정체불명의 중국풍 공간에서는 황당한 느낌을 받게 된다. 불로초를 구하러 온 서복이 정방폭포에 글자를 새겨 놓았다는 것을 모티프로 삼아 기획되었을 것인데, 누구를 대상으로 해서 만들었을까를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는 공간이다.
이중섭 거리는 가족들이나 친구들과 왔을 때는 보고 이야기할 것도 많아 소소한 재미를 많이 느꼈던 기억이 있는데 걷는 길 마지막에 쓱 지나가게만 되니 별 감흥이 없다.
제주올레여행자센터에 도착해서 씻고 세탁물을 통에 넣고 와서 (세탁물을 망에 넣어서 통에 놓으면 모아서 세탁을 해 준다.) 다른 올레꾼들과 각자의 걸은 길 이야기를 나누며 공통 관심사를 나눈다. 평소에는 모르는 사람들과 쉽게 섞여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 하는데 길을 걷는 사람들과는 금방 친숙하게 대화를 나누게 되니 신기한 일이다. 가보지 못했던 추자도 이야기가 나와서 대화에 끼어든 것인데 요즘 추자도 배편을 구하기가 힘들어, 어렵게 갔다 온 사람과 가지 못한 사연들이 이야기되어, 추자도 올레를 어떻게 할까 생각을 하던 나의 고민을 간단히 해결해 주었다.
저녁을 먹으러 내려가서 반주를 곁들여 식사를 하고 있는데, 서명숙 올레 이사장이 앞쪽 테이블에서 완주 올레꾼들과 프로그램을 마치고 뒤풀이를 하고 있어서, 예전 올레길을 동행했던 기억을 팔아 아는 체를 하니 반가워하면서 같이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이사장과 친한 올레 마니아 선배에게 사진을 보내 자랑을 하니, 바로 나에게도 이사장에게도 카톡으로 안부 답장을 쏟아낸다.
보름째 올레길을 걷고 오늘도 30km 정도를 걸으셨다는 연세가 80이 가까운 올레꾼의 트래킹 내력을 들으며, 아직은 젊은 나이인 지금 엄살 피우지 않고 많은 것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하루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