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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여기가 무릉도원 – 올레 11코스

모슬봉, 곶자왈, 무릉도원, 다음을 기약하며~

by 깡통로봇

2022년 4월 9일 오후, 올레 11코스 ( 모슬포항 – 무릉 )


숙소에 배낭을 내려놓고 작은 가방에 물 한 병 넣고 걸으니 세상 몸이 가볍다.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평소에 가지고 싶었지만 중복된 느낌이 있어서 머뭇거리던 등산 가방을 구매하였다. 오스프리 케스트랄 48리터 배낭인데, 사람들의 사용 담처럼 편하고 가벼웠다. 허리에 짐의 무게가 잘 분산되게 받쳐져서 어깨도 베기지 않아 무리 없이 걸어왔지만 그래도 짐은 역시 적거나 없는 것이 최고란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올레 11코스는 올레 홈페이지에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길’이란 설명이 붙어 있는데, 모슬봉을 올라가면서는 이 말이 너무 실감 나게 다가왔다.


모슬봉은 산 정상엔 군사시설이 자리를 잡고 있어 옆으로 돌아가는 길을 걸어가는데, 숲 속으로 난 오솔길을 잠시 지나고 나면 온통 무덤들로 가득한 곳을 계속 지나게 된다. 공동묘지 지역인데 지나는 사람도 없이 혼자 가고 있어 딴 때 같으면 꺼림칙할 만도 한데, 날이 워낙 좋아 어둡거나 우울한 느낌이 없어서 그런지, 보이는 전망이 좋아서 그런지, 많은 무덤들이 그냥 하나의 풍경처럼 느껴졌다. 장례와 묘지 문화에 대해 획기적인 변화와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괜히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보게 된다.


동쪽 들판이나 산길을 지날 때는 무밭을 많이 보며 지나왔는데, 이쪽으로 오니 마늘과 파를 심어놓은 밭을 많이 만나게 된다. 비가 오지 않아 물을 뿜는 기계가 계속 돌아가며 물을 주고 있다.



지나는 길에 정난주 마리아 묘역 안내판을 보게 되는데, 정약용의 조카딸이자 황사영의 아내로 제주도로 유배 와서 관비로 삶을 마감하였는데 후에 순교자 묘역으로 단장하였다고 한다.

황사영 백서 사건은 신앙의 자유와 민족적 반역이라는 어마어마한 다루기 힘든 논쟁거리를 남기는 역사적 사건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박노자와 허동현 교수가 “우리 역사 최전선”이라는 책에서 생각해 볼 만한 논쟁을 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감정적으로 단순하게 재단할 수 없는 개인의 인권과 종교의 자유, 민족적 주체성, 제국주의, 연대의식 등등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황사영 백서는 천주교 박해를 고발하면서 조선교회를 재건하는 방안으로 청나라 황제에게 청하여 조선도 서양인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거나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켜 감독하게 하거나, 서양의 배 수백 척과 군대 5만∼6만 명을 조선에 보내어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도록 조정을 굴복하게 하는 방안 등을 제시하였는데, 이러한 내용을 접한 조정에서는 아연실색하여 관련자들을 즉각 처형함과 동시에 천주교인들에 대한 탄압을 한층 더 강화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요약)



가지고 온 물통이 벌써 비어 편의점에 들러 물 한통을 사 가지고 간다. 햇살이 강해 벌써 덥게 느껴지며 물도 자주 마시며 욌는데, 신평-무릉 곶자왈로 들어가면서부터는 숲 길의 시원함과 안온함을 느끼며 걷게 된다.

곶자왈 숲길은 나무와 덩굴이 우거져 원시적 느낌을 주는데, 그렇다고 위압적이거나 하지는 않고 친밀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무릉이라는 이름에서 이상향이 연상이 되어서 더 그런지, 숲길을 걷는 걸음마다 기분이 좋아지며 행복감을 느낀다.


앞에서 모녀가 걸어가는데 어머니가 딸에게 나무나 풀에 대해서 틈틈이 설명을 해 주면서 간다. 그럴 때마다 딸이 정감 있게 답을 하며 또 이것저것을 물어보아 연세 드신 어머니의 설명에 힘을 불어넣는다.


갓 올라오는 여린 연둣빛 잎새들에 투명하게 반짝이는 봄의 햇살만큼 사람의 마음을 순하게 만들어 주는 것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아름다운 숲길로 선정되었다는 안내판을 뒤로하고 곶자왈 숲길을 벗어난다.



11코스가 마쳐지는 무릉 외갓집을 지나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정류장을 찾아가는 데, 마을 길 옆에 서 있는 4.3 위령비를 만나게 되면서 제주 어디에나 스며있는 아픔을 다시 한번 느끼며 간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대형 택시가 와서 선다. 사람 왕래가 적은 곳은 대형택시가 버스의 역할을 대신한다고 한다. 낯설다 생각하다, 이런 한적함이 좋아서 지금 여길 와서 걷고 있는 것이란 생각을 하며, 사람이 살기 좋은 규모와 속도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다른 이용객을 만나지 않아, 같은 장소에서 승차한 다른 올레꾼과 둘이 모슬포까지 정말 택시처럼 타고 이동을 한다.



숙소로 가는 길에 해가 떨어지기 시작해서 바닷가에 앉아 잠시 해 지는 장면을 구경한다. 붉은 노을을 보면 항상 어떤 비장미를 느끼는데, 마지막을 장식하는 의식의 장엄함과 황홀함이 감정을 흔들어 놓기 때문일 것이다.


숙소로 돌아와 배정된 방으로 들어가니 먼저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있는 게스트가 있어, 인사를 나누고 씻고 와서 짐을 정리한 다음 저녁 식사를 하러 나가려 하는데, 같은 방을 쓰게 된 분이 심심해하는 것 같아 반주나 한 잔 하자고 하여 같이 나가게 되었다.


닭갈비를 시켜놓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서로의 상황이 참 많이 비슷하다. 내가 2월 말에 명예퇴직을 했는데, 이 분은 3월 말에 소방 공무원을 명예퇴직하고 바로 올레길을 걷기 위해 내려왔다고 한다. 나이도 거의 동년배인 데다 자식들도 비슷한 연배라 서로의 고민에 대해 쉽게 이해가 되고 해서, 서로 뜻이 맞는다고 술잔을 자주 기울이다 보니 조금 많이 마시게 되었다.

사실 급작스레 일이 생겨 다음날 아침 일찍 서울 가는 비행기표를 끊어놔서 새벽에 일어나서 나가야 했는데, 전날 마신 술의 영향으로 나갈 시간보다 살짝 늦게 일어나 비행기 시간을 맞추어 가느라 정신없이 서둘러 택시를 불러 타고 공항으로 이동을 해야만 했다.


이날 묵은 게스트 하우스는 아침을 잘 준다는 입소문이 있어 일부러 예약을 했던 것인데, 일이 생겨 새벽같이 나가느라 아침식사를 구경도 못하게 되어 무척이나 아쉽다.




제주를 한 바퀴 쭉 걸어서 공항까지 도착해 보려고 했으나,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 중간에 돌아가게 되면서 올레길을 걷는 것의 완성은 다음으로 미루어지게 되었다.


아쉬운 마음도 많았지만, 한편으로는 올레길을 걸은지 10일 정도 지나니, 걸으며 보는 것들이 다 비슷해 보이고, 느낌이나 생각에서의 신선도도 좀 떨어지는 경향이 있어, 조금 틈을 두고 이어 걷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10일 오전 서울에 도착하니 아파트 단지에 벚꽃이 만개하여 화사함이 절정에 도달하고 있는데, 열흘쯤 전에 제주에서 먼저 보고 사진으로도 전해 주었던 봄의 아름다움을, 시간 차이를 두고 서울에서 다시 만끽하게 되니, 올해는 봄을 두 번 맞이하는 느낌이다.


여름이 지나고 더위가 조금 꺾이면, 못다 걸은 길을 찾아 다시 갈 것을 기약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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