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흥분을 가져온다.
비행기가 공항에 도착해서 트랩을 내려오면서, ‘어! 의외로 쌀쌀한데’ 하는 생각을 했다. 요즘 날씨가 이상하게 더워졌어서 제주도는 더 따뜻할 것을 예상했는데, 구름이 짙게 내려진 제주의 바람에 의외의 냉기가 서려 있었다.
올레길을 걷겠다는 생각은 퇴직을 하고 새로운 시작을 하는 출발 의식처럼 떠올랐다.
직장 생활을 하는 남들은 오기 힘든 시기에 여유를 가지고 자기의 생각을 정리해 나가면서 긴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좀 낭만스러운 면이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볼까 하는 생각도 해 봤는데 코로나라는 시기도 그렇고, 체력에 대한 판단도 할 수가 없어 먼저 올레길을 걸어 보자고 선택을 했다.
그래서 공항을 빠져나오면서 공항 담을 끼고돌며 바닷가 쪽을 향하는 용해로에 들어섰을 때는 발걸음에 들뜸이 묻어 있었다. 쭉 늘어서 야자수들이 만들어내는 이국적 풍경과 늘어선 렌터카 회사 상표들을 지나치면서 절로 여행자로서의 감상이 올라오면서 발걸음을 쿵쾅거리게 했다.
이런 감정 오랜만이네. 여행을 오기 전에는 심정이 뜨뜻미지근해 가지고 이게 뭐지 했는데...
올레길을 계획하면서 택시나 버스 등의 교통수단을 이용하지 말고 걸어서만 가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오늘은 공항에서 올레길로 붙어서 제주 시내까지 이동을 할 계획이다.
공항 담장 옆으로의 풍경들은 정리 덜 된 변두리의 느낌이었지만 밭 주변의 소박한 유채꽃 더미들과 채 크지도 않은 조그만 벚꽃 나무의 개화도 들뜬 마음에는 만족을 주기에 부족함은 없었다.
조금 걸어 지나가게 된 바닷가 다끄네물의 용천수 3단 돌 웅덩이 위로는 비행기가 머리를 스치듯 내려앉고 있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걷는 길을 만났다는 생각을 하며, 해안도로를 살짝 걸어가니 용두암이 나온다. 용두암은 여러 번 들르고 스쳐가고 했지만, 신혼여행을 와서 용두암을 오려고 택시를 탔을 때, 택시 기사 아저씨를 지역 방송국에서 촬영을 하고 있어서 느닷없이 출연을 하게 됐던 기억이 가장 강하다.
이때부터 유채꽃이며 벚꽃이며 흰색 들꽃들이 섞여 있는 주변 풍경이 봄기운 가득한 아름다운 제주라는 이름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풍경은 처음에 만끽하는 게 좋다는 걸 여행의 막바지에 깨닫는다. 나중에는 만개해 흐드러지게 핀 그 아름다움도 너무 지천으로 펼쳐져 계속 보다 보니 느낌이 조금 시들해지니 말이다. 용연 다리를 지나면서 풍경에 감탄하고 사진을 찍어 친구들 가족들에게 자랑스레 전송을 하고 걸어가다 보니 숙소가 너무 일찍 나와버렸다.
숙소에 짐 정리를 간단히 하고 씻고 나와서 근처 식당에서 국밥을 시켜서 먹는데, 혼자 여행할 때의 가장 큰 문제는 혼밥을 하게 될 때이다. 같이 소주 한 잔을 기울일 친구가 이때만큼 간절할 때가 없다.
식당 안에서는 어디에서나 있을 법한 아저씨들의 술자리가 있었는데 역시 어디에서나 있을 법하게 거나해서 목소리 큰 사내의 우렁찬 호소가 메아리 없이 울려 나갔다.
늦게 들어와 옆 테이블에 자리 잡은 고등학생 딸을 데리고 여행 온 부부의 사연은 듣고 싶지 않아도 마치 일행의 사연처럼 들려왔다.
“여행 좋았냐? 어때? 당신은 어땠어?”
“나는 좋았지. 꽃구경도 잘하고 말도 타고. 너도 좋았지?”
“응”
“좋았지? 야! 그럼 우리 또 언제쯤 놀러 가자. 9월쯤에 또 갈까?”
“이렇게 또 놀러 가면 좋지. 맛있는 것도 잘 먹고.”
“그럼 다음엔 어딜 갈까? 요즘 부산 많이 간다는데 부산 갈까? 부산”
아빠가 여행이 좋았다는 대답에 한껏 들떠 고조된 어조로 연거푸 질문을 쏟아낸다.
“부산 좋지. 부산 한 번도 못가 봤는데.”
“그럼 다음엔 부산으로 가자. 9월에. 에~ 근데 뭐 9월까지 있어 다음 달에 가도 되지.”
“5월에 갈 수 있어? 5월에 가면 더 좋지.”
“너도 좋지? 학교는 체험활동 또 낼 수 있지?”
“근데, 여행 같이 간다고, 할 게 뭐가 있어? 같이 하는 게 어색하기만 하지.”
핸드폰만 들여다보다 툭 찬물을 한 바가지는 되게 뿌리는 딸의 말에 분위기가 혹 가라앉는다.
“야, 그래도 아빠가 전에는 같이 지내지 못하고 잘못을 했지만, 이제는 서로 같이 즐거우려고 노력을 하는 건데, 그건 그래도 잘 받아 주는 게 좋은 게 아니냐? 너도”
엄마가 얼른 중재를 해 보려 하지만 들떴던 아빠의 분위기는 이미 비우는 소주잔 밑으로 가라앉았다.
모든 가정에는 그들만의 고민이 다 달리 있겠지만, 부모와 자식의 소통 불가 문제는 참으로 골치 아프고 부모로서는 고통스러운 문제일 것인데,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이 땅 아버지들은 아이들 어렸을 때 참 조금만 잘하고 살지 하는 생각도 들어서 입 맛이 쓰다.
가까이에 제주목 관아가 있기에 들러보았으나 이미 관람 시간이 지나 문이 굳건히 닫혀 있다. 옆에 멋지게 서 있는 관덕정을 찍으려고 하는데 나이 든 사내 둘의 기싸움이 옆에서 벌어지고 있어서 잠시 피해 이따가 돌아오는 길에 찍어야지 하고는 광해군 유배지 터를 찾아간다.
50은 다 되었을 것 같은 사내 둘이 정담을 나누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옷을 벗어던지고 머리를 맞대고 말싸움이 크게 고조된다. 어떤 사연으로 저 둘은 어두운 시간에 옛 관청 앞에서 제 자존심을 세워나가는 것일까? 궁금하다기보다는 안쓰러운 감정을 뒤로하고, 찾아간 광해군 유배지 터는 휴대폰 지도 상에만 흔적이 있고 현실에서는 공사 현장만 펼쳐 있어 허망함을 느끼며 돌아간다. 길가에 칠성대 북두칠성 제이도 안내판이 있어 탐라가 별의 나라였음을 알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관덕정 사진을 찍었는데, 나중에 자세히 확인해 보니 빈 풍경이라 생각했던 곳에 두 여인이 찍혀 있다. 그 앞 건널목으로 건널 때 서로 만나며 검은 비닐봉지 속에 담긴 파일 것 같은 것을 전해주며 손을 맞잡고 정겨운 말을 나누던 사람들인 것 같다. 그들이 서로 나누는 말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였기에 흘러 지나갈 뿐이었는데, 이렇게 흔적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