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을동을 지나다.
조금 일찍 눈이 떠져 준비하고 7시에 출발한다.
관덕정 옆에 있는 마트에서 초코바 몇 개와, 육포, 물 등 비상식량을 사서, 관덕정에서 가방에 정리해서 넣다가 어제저녁 대비되는 두 장면의 사람들을 잠시 떠 올린다.
허망했던 광해군 유배지터를 지나 18코스를 본격적으로 걸어본다.
올레길을 걷는 올레꾼들은 보통 패스포트에 도장을 찍으면 걷는데, 나에겐 이게 영 어색한 일이라 하지 않기로 했는데, 나중에 올레를 걷고 종착점에 도착하면 스스로에게 보상을 하듯 코스 표지석이랑 사진을 찍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재밌어하게 된다. 완주증을 받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길을 걸어가면서 지루할 수 있는 상황에 하나의 재밌거리로 패스포트에 도장을 찍으며 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해 보지만, 다음에도 내가 하지는 않을 듯하다.
넓은 도로를 건너 분위기 좋은 사당을 만나 기분이 좋았다. 아침 밝은 분위기와 어울리게 벚꽃 두 나무가 나란히 꽃잎을 가득 이고 서 있다. 사전에 알지 못했던 장소라 살펴보니 오현단이라고 한다. 제주 교학 발전에 공헌한 오현을 배향했던 장소인데 송시열의 비석을 보며 감흥이 훅 줄어들었다. 노론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강하게 가지고 있어서, 그냥 분위기만 멋진 곳으로 기억하고 지나가자 하고 생각하고 지나간다.
동문시장을 지나며 국수라도 한 그릇 먹고 싶어 가게들을 둘러보는데 장사를 하는 집을 찾지 못해 아침 해결은 조금 미루어졌다. 산지천을 따라 걷다가 제주 중심을 이렇게 큰 물이 흘러가고 있는 것에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김만덕 기념관을 지나며 잠시 베풂의 정신에 대해 생각하고 지난다. 이렇게 의외의 장소에서 불현듯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 기분이 좋다. 은혜의 빛이라는 문구가 크게 걸려 있어 교회 건물인가 하고 봤는데 김만덕 기념관이라서 고정적 이미지에 의한 판단 미스에 웃음을 지었다.
길은 제주항을 스치며 이어지고 있고 제주항 앞 넓은 도로를 제주도를 일주하는 것으로 보이는 로드 자전거 두 대가 빠르게 달려 지나간다. 사람도 차량도 거의 없는 도로를 화창한 아침에 달려가는 기분이 매우 좋겠다. 올레를 도보로 일주한 후에 자전거로 한 바퀴 돌아볼 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한다. 코로나로 인해 자전거 타는 것이 유일한 운동이 된 탓에 자전거 타는 것만 보면 관심이 올라온다.
4.3 유적지 안내 표지석이 서 있어 가까이 가 살펴보니 제주 주정 공장 옛터 자리에 4.3 당시 민간인을 수용하고 탄압한 내용이 적혀 있다. 공사를 하는 가림막을 돌아 안으로 들어가니 끌려가는 사람들을 보여주는 추모 조형물이 서 있다. 추모의 마음을 담아 희생자들을 기리고는 착잡한 마음을 다스리며 사라봉을 향해 걷는다.
사라봉을 오르는 길은 초입에서부터 4월에 제주를 오려고 선택한 자신을 칭찬해 주는 풍경이 펼쳐졌다. 푸른빛이 완연하고 봄 제주를 만끽할 만한 꽃들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오르막 길 양 옆으로 하얗게 벚꽃들이 터널을 만들어 주었다. 사진을 찍으며 가는 가족들과 친구들, 연인들을 지나쳐 숨차게 봉우리를 올라 정자 위에 올라보니 벚꽃 나무들 위로 제주항과 둘레 바다 전망이 한눈에 들어오고 반대편으로는 오름들이 멀리에 마치 능선 봉우리들 마냥 서 있다.
정자 아래로 내려오니 방사해놓은 것으로 보이는 토끼들이 여러 마리 보인다. 얼른 사진을 찍어 가족들에게 보내 주니 딸아이의 반응이 신속하다.
사라봉을 내려오면서 별도봉 산책길로 들어서면서는 혼자서는 찾아내지 못했을 풍경들을 걷고 있음에 고마움을 느꼈다, 동백나무 숲길이 이어졌는데 뚝뚝 떨어져 있는 동백꽃들을 목책 난간 위에 사람들이 하나씩 얹어 놓았다. 부처님 길을 밝혀 놓는 등불 같은 느낌도 나고 마음이 흐뭇하다.
별도봉의 그 아름다움의 극치에서 4.3의 비극이 서린 곤을동을 만난다.
항상 물이 고여있는 땅이라는 의미를 담은 곤을동은 4.3 때 토벌대에 의해 마을이 전소되고 많은 마을 사람들이 희생된 곳이다. 지나다 보면 집의 경계인 돌담만 남아 있고, 그 돌담 안 자리마다 꽃이 환하게 피어 있고 푸른빛 풀과 유채가 잔인하게 아름다운 봄의 풍경을 만들고 있어 가슴 아픈 역사를 더 가슴 저릿하게 만나게 된다. 잠시 모든 생각이 멈춰지고, 먹먹한 감정이 묵직하게 눌려온다.
이제는 4.3에 대하여 국가 차원의 사과가 이루어지고 국가 기념일로 지정되어 대통령이 추념식에 참석하기도 하고,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국방부의 유감 표명과 경찰청장의 무고한 양민 학살에 대한 사과가 이루어져, 그 진실이 많이 밝혀지고 있다. 그렇지만 1948년을 전후로 한 대규모의 민간인 학살과 탄압 이후로도, 1990년대까지만 해도 4.3에 대한 언급을 금기시하고 진상규명을 하는 운동을 불온시하며 극심한 탄압이 이루어지는 등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의 폭력적 정권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사건이다.
올레길 방향을 시계 방향으로 잡은 것은 4.3을 기억하는 마음으로 곤을동, 북천 너븐숭이 등을 4월 초에 지나가며 추모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화북천을 지나면서 곤을동에서 큰 개를 데리고 건천(乾川)을 건너가는 소녀를 보았다. 잠시 후 리트리버로 보이는 개는 소녀와 커피집 앞 바닷가 잔디밭에서 천진하게 뛰어놀고 있었다. 밝고 평화로움이 넘치는 장면이어서 아픈 역사와 대비되며 깊이 인상이 남았다. 우리의 역사도 저래도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마음 한편이 너무 아리게 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