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먹지 못해 점심 겸해 식사를 하려고 밥집을 찾는데 마땅치가 않아 계속 마을을 지나오다 길가 식당에서 고기 국수를 한 그릇 시켜 먹는다. 고기국수는 예전에는 돼지고기 육수 국물의 진한 맛과 돼지고기 수육을 느끼하게 생각하는 육지 여행객들이 많아, 주문을 할 때 주인들이 드셔 보셨냐고 물어보기도 했었는데, 이제는 제주 고유의 대표적 음식으로 대접받는 메뉴가 되어 누구나 부담 없이 즐겨 먹는다. 입맛이 그렇다. 예전에는 김치가 해외에서 냄새나는 음식으로 취급받다가, 이제는 일부러라도 찾아 먹어보는 음식이 되니 냄새가 난다는 악평은 찾아보기 힘들게 된 것이다. 점심시간이 아직은 안 돼서 사람이 없다. 먹는 동안이라도 신발을 벗어 발을 숨 쉬게 해 주고, 천천히 먹는다.
잔치나 제사 지내러 가던 옛길을 복원했다는 신촌가는 옛길의 거친 황야 느낌이 나는 길을 씩씩하게 걸어가는 젊은 올레꾼의 앞선 발걸음에서 활기찬 기운을 받으며 간다.
올레 리본이 이끄는 대로 큰길을 벗어나 따라가서 만나게 된 시비코지에서의 전망은 정말 느닷없이 거칠고 강렬하게 다가와서 경이로움을 느꼈다. 멀리 보이는 닭모루까지의 풍경이 예상되지 않았던 곳에서 시작되었는데, 현무암들의 검고 거친 물결과 푸른빛이 나타나기 시작은 했지만 아직은 누렇게 퇴색한 빛으로 거칠게 나부끼는 풀들이 만드는 풍경은 야생의 느낌을 그대로 전달해 줬다. 이어지는 닭모루까지의 바닷길은 시원한 눈 맛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조금도 없다.
없던 길을 찾아내어 잇고 길에 리본을 달고 표식을 설치한 이들에게 저절로 감사의 마음이 생겼다.
올레 리본은 처음에는 길을 찾는 표식으로만 인식되다가 몇 번 길을 놓칠 뻔하다가 리본을 찾아 다시 길을 찾게 되면서는 친밀감이 생겨 사람 없는 길을 걷다 보면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안녕. 올레.”, “반가워, 와 길을 잘 못 든 줄.”, “바람이 많이 분다.” “이제 좀 지루하긴 한데~”, “와! 여기 너무 좋아” 그리고는 씨익 웃게 되는 것인데, 사람이 이상해진 건가???
이런, 숙소에 너무 빨리 도착을 해 버렸다. 1시 조금 넘어 예약해 둔 숙소엘 오게 된 것이다. 날은 좋은 데 바람이 불어, 앉아서 쉬다 보면 금방 서늘함이 느껴져서 바로 출발하게 되다 보니 예상 시간을 많이 당겼다.
가방을 내려놓고 물 한 통과 간단한 간식거리만 쌕에 넣어 들고 계속 걸어간다.
가방을 벗으니 날아갈 것 같다. 날개가 돋아 오른 것 같다. 가방의 불편함이나 무게를 별로 느끼질 않고 왔었는데 벗으니 오히려 가방의 무게가 느껴졌다. 우리 삶의 평소 무게도 그러할 듯하다는 생각이 든다.
올레길이 바다를 접한 길이 많다 보니 걸으면서 많은 연대와 망루를 만나게 되고 곳곳에서 환해장성(環海長城)을 지나게 돼서, 외적의 침입에 긴장감을 가져야 하는 지리적 특성과 삶의 고단함이 느껴진다. 그중에서도 연북정은 규모가 크고 장대해 보는 맛이 있는 문화재이다. 그런데 연북정(戀北亭)이라니, 그 이름이 살짝 마음에 거슬린다. 북쪽 한양에 있는 임금을 사모한다는 의미겠으나, 외적 앞에 힘들어야 했던 백성들의 삶과는 달리 중앙 정치에서 불러 주기만을 갈망하는 벼슬아치들의 마음이 너무나 드러나는 듯하여 씁쓸한 뒷맛으로 남는다.
늙어 제주로 귀양을 왔던 송시열이 남긴 시조에서 그들만의 충절을 다시 한번 느껴본다.
님이 헤오시매(사랑해주시다) 나는 전혀 믿었더니 / 날 사랑하던 정을 뉘손대(누구에게) 옮기신고. / 처음에 뮈시던(미워하신던) 것이면 이대도록 설오랴.
늙고 병든 몸이 북향(北向)하여 우니노라 / 님 향한 마음을 뉘안 두리마는 / 달 밝고 밤 긴 적이면 나뿐인가 하노라
연북정에 대해 자료를 찾아보니, 절제사 이옥(李沃)이 부임한 후 '조천에 관을 둔 것은 실로 도적들이 다니는 길목의 요충이며 왕명을 받는 곳이기 때문인데 이 같이 성이 좁고 건물이 노후할 수 있겠는가? 어찌 농사짓는 틈틈이에 개축하여 웅장하고 화려하게 하지 않겠는가?' 하여 성은 동북쪽으로 물려서 쌓고 그 위에 망루를 안치하여 쌍벽(雙碧)이라 하였다.‘고 하고, 쌍벽은 청산녹수(靑山綠水)에 접하여 있다는 뜻에서 붙인 것이라고 하니, 암만해도 백성들의 삶을 살피는 것과는 거리가 있는 명분으로 보인다. (쌍벽정이 나중에 연북정으로 이름이 바뀜)
올레 19코스 안내소에 들러 간세라고 하는 말 모양의 올레 마스코트 기념품을 사서 가방에 단다. 인상 좋은 올레지기께서 걸음의 여정을 물으며 응원을 해 주니, 이제 다시 시작 느낌을 받는다.
조천 만세 동산의 제주항일기념관을 지나 19코스를 조금 걸어가 본다.
들길을 지나 해안도로를 걷다 보니 신흥 해수욕장이 나오는데 그리 넓지도 않고 별로 알려지지도 않은 곳 같았는데, 사람 없는 모래사장에 젊은 연인이 바람에 옷과 머리를 날리는 서 있다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이 맑은 물빛과 어우러져 화보를 찍는 느낌을 준다.
신흥 해수욕장을 지나가다 첫날부터 너무 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자제를 하고, 올레 길을 벗어나 지름길로 숙소를 향해 돌아간다.
돌아오다 연북정 근거리에 있는 조천 비석거리를 만난다. 꽤 많은 공덕비가 세워져 있는데도 가는 길에는 보지를 못 하고 지나갔다. 한 발짝만 빗겨 있어도 못 보고 지나가는 것들이 이렇게 많다. 그러면서 나의 경험을 앞세워 거기엔 그런 거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경계하고 경계해야 할 일이다.
걷다 보니 제주에는 유난히 공덕비가 많다. 많아도 유난히 많다. 용천수가 솟는 곳마다, 마을 한가운데쯤이면 진(津)터마다, 그리고 여기저기. 대개 백성들의 삶이 고달팠던 조선 후기에 세워진 것이 많다고 하니, 실제 많은 공덕이 있어 칭송을 받는 것은 아닐 것이고, 팍팍한 백성들의 삶과는 상관없이 스스로 공덕을 치하받고 싶은 사람들이 많았던 것일 것이란 생각이 든다.
숙소에 돌아와 세탁기를 돌리고 기다리는 동안에 공용 공간 한 구석에 있는 발 마사지기에 발을 넣고 마사지를 하며 청년 올레꾼과 인사를 나누며 걸은 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재밌는 일은 이 청년 올레꾼과는 4코스를 걷고 남원에 있는 나무이야기 게스트하우스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처음엔 알아보지 못하다가 대화를 좀 이어가고서야 서로 만났던 사람인 것을 알고 반가워했다. 코로나 시국에 마스크를 쓰고 사람을 대면하게 되면서 생긴 웃픈 현상이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눈만 내놓은 채 사람을 만나게 되면, 가려진 부분은 자신의 상상으로 이미지를 만들어, 나중에 실제 얼굴을 보게 되었을 때 크게 당황하는 경우가 많았다. 살짝 가려진 얼굴도 그러한데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상대방이 내 맘대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만든 캐릭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사람들 간의 관계에서 오해와 갈등이 끊임없이 생기는 것이겠다.
출발 전에 살짝 삐끗해서 아팠던 허리의 통증을 가라 앉히기 위해 약국엘 들러 약을 사고, 작은 동네 손만두집에 들어가서 만둣국을 시켜 먹는데, TV 속에서 왕왕대는 종편 방송의 토론 패널들의 소리가 거슬려 스포츠 채널로 틀어달라고 부탁을 한다.
그런데 이 집 만두가 생각보다 맛이 좋다. 만두가 참 맛이 있다고 하니 할머니가 직접 만드신다고 하며, 싸고 있던 작은 김밥을 들고 와 먹어보라고 입에 넣어 주시고 몇 개를 놓아주신다. 한쪽엔 준비된 만두소가 놓여있다. 다 칼로 다져서 만든다고 하시는데, 그래서인지 만두 맛이 남다른 데가 있다. 이젠 만두소를 만드는데 칼질을 하는 게 힘이 드신다고 한다. 인심 좋고 솜씨 좋은 할머니의 맛을 느끼고 가는 마음이 푸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