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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환상적인 김녕해변과 성세기 태역길-올레19,20

너븐숭이 4.3 기념관에서 감당 못 하는슬픔

by 깡통로봇

올레 19코스, 20코스 중간 (조천에서 김녕포구, 광해군 기착비) 2022년 4월 2일



조천 만세 동산의 제주항일기념관을 지나 어제 걸어갔던 길은 지름길로 통과해서 간다.

지나가는 길에 관심을 가져 보았던 게스트하우스들을 만나게 된다. 어느 곳은 안심을 하고 어느 곳은 아쉬워한다. 그래 봐야 하루 자는 것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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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리를 지나며 볼레낭할망당이라는 표지석을 본다. 말이 낯설어서 살펴보니 보리 장나무 앞에 여신당을 모신 곳이다.

제주는 신화의 고장답게 신당이 매우 많은데, 길이 나고 개발이 되고 하면서 잘 보존되지 못하는 곳이 많아 안타깝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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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리 방사탑을 지나고 신흥리가 생길 수 있었던 이유가 되는 쇠물깍을 만난다. 용천수가 솟아나는 곳에 사람이 살 수 있는 마을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도 여지없어 공덕비가 옆에 수두룩 세워져 있다.




화창한 날, 부드럽게 빛나는 햇살 사이로 바람이 결결이 살아 날아간다. 색상 고운 바람이 살짝 매만지고 지나가니 세상이 다 아름답다.

물빛 곱기로 소문난 함덕 해수욕장을 지나면서 아이들이 떠올랐다. 제주 바다에 가족들이 같이 들어가서 논 적은 없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모래사장과 옆의 야자수 둘러친 잔디밭의 풍경 안에 그들과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오뉴월에 한번 같이 오면 좋겠다.


해수욕장을 지나 서우봉을 오른다. 높이를 조금씩 높일수록 함덕의 고운 물빛과 산 위의 유채꽃 색상의 어울림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런데 길이 예상과 달리 봉우리를 향하지 않고, 중간쯤에서 옆의 좁은 길로 횡행을 한다. 사람 없는 숲길의 느낌 부드러운 흙길의 감촉이 만족감을 만들어 내다 툭 하니 환상의 전망을 내여 놓는다. 바다 전체가 조망이 되고 유채꽃 밭이 깔려 있는 위로 숲길의 덩굴과 나무의 어울림이 어디에도 뒤지지 않을 기억의 풍경을 던져준다. 이건 그냥 가기가 좀 힘들다. 벤치에 가방을 내려놓고 가방에서 맥주 한 캔과 긁적일 공책을 꺼내 든다. ‘이 맛이지’하고 맥주를 시원하게 한 모금 들이키는데 느닷없이 흥분한 말 울음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온다.



‘말이 있었나?’

유채꽃 밭 옆의 공터에 갈색 말이 콧 김을 내뿜으며 거칠게 울어 대고 있다. 무슨 일인지 확인하려고 둘러보니 트럭에 실려 흰색 털을 가진 말이 들어오고 있었다. 스쳐가는 바람에 얹혀 짐승의 누린내 일지 페로몬의 향일지가 훅하고 지나간다. 트럭이 가까이 오자 말의 울음소리가 그치고 끈의 범위 안에서 말이 힘차게 뛰다 멈춘다. 바야흐로 봄이다.


옆 벤치에 몇 팀이 교체되면서 쉬었다 갔는데 어제 18코스를 같이 걸었던 청춘 남녀가 친근한 대화를 나누면서 사진을 찍고 앉는다. 어제는 두 명이 서로 각각 걸었는데. 여행은 사람의 거리를 쉽게 좁혀 놓는다.




밭 사이로 난 좁은 길과 포구를 지나 너븐숭이를 지나게 된다.

너븐숭이는 넓은 돌밭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4.3 희생 중 한날한시에 446명의 최대 희생자가 발생한 비극적인 장소이다. 이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너븐숭이 4.3 기념관과 추모비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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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현기영의 ‘순이삼촌’을 읽고 4.3 북촌에서의 비극상을 알고 가슴에 울분을 묻었던 기억들, 안치환의 노래 ‘잠들지 않는 남도’를 부를 때마다 환기되어 오던 고통과 분노, 애기무덤, 강요배 화백의 ‘젖먹이’ 그림 등을 보면서, 쓰린 감정의 솟구침 앞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춤주춤 거리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으니 이 나이에도 감정을 다스려 내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 희생자 유족들은 그 긴 시간을 어떻게 견뎌며 살아왔던 것인가


그런데 생각해 보니 젊었을 때는 분노하면서 견뎌지던 슬픔이 이제는 오히려 잘 견뎌지질 않아 어떻게 해서라도 피해 보려고 하는 습관이 생기기도 한 것 같다.

세월호 가족의 아픔을 그린 ‘생일’을 보면서는 솟아오르는 눈물이 주체가 되질 않아 다 젖은 손수건과 휴지 한 웅큼을 가지고 영화관을 나오게 되었고, 고문의 역사를 담은 ‘남영동’이라는 영화는 끝내 보지를 못했다.




동복리 마을 운동장을 지나면서 덩그러니 봄 햇살에 던져져 있는 그 넓은 공터를 보니 혼자 차지하고 누워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 잔디 풀밭에 가방을 내려놓고 신발을 벗고 크게 누워 잠시 낮잠을 누려본다. 이런 호사가 다시없다. 그런데 이런 호사 뒤로 손등을 태워 먹은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봄볕 무섭네.





여러 대의 풍력 발전기 발전기를 지나 밭 사이의 들길을 걷고 있는데, 느닷없이 밭에서 일을 하시던 할아버지가 큰 소리를 치신다. 순간 ‘내가 뭘 잘못했나’ 당황하며 바라봤는데, 꺾어지는 길에서 잘못 가고 있다고 알려 주시는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면 이렇게 앞으로만 가는 경향이 있다. 할아버지의 고마운 외침으로 길을 제대로 찾아들어 계속 걸어 숙소에 도착한다. 오늘도 역시 너무 이르다. 1시가 안 됐네.


출발에서 도착까지 완벽한 느낌의 만족감을 느끼는 길이었다.


숙소에 짐을 내려놓고, 더 걷고 식사하기 위해 역시 가볍게 물 하나 챙겨 조금 더 걸어가니 19코스의 마지막과 20코스의 시작을 알리는 간세가 서 있다.



김녕 해수욕장 부근의 식당을 찾아 아침부터 부지런히 걸어온 나를 칭찬하는 거나한 점심을 시켜 보자 마음먹었는데, 역시 혼자라는 건 음식 메뉴 선택에서 아주 악조건이다. 전복 해물 뚝배기와 맥주를 시켰다가 음식이 나오는 것을 보고 소주로 주종을 바꾼다. 신발끈을 풀어서 신발을 벗고 발에 휴식을 주고 앉아 천천히 음미하듯 식사를 한다. 쉬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밥을 천천히 먹어야 한다. 푸짐한 상차림에 기분 좋게 한 잔씩 음미하며 해물 듬뿍 담긴 뚝배기를 먹어 나가는데 실한 전복이 많이 들어있다.


해수욕장을 지나가자 김녕 지질 트래일이 시작된다. 성세기 태역길이라고 이름 붙여진 길에선 이런 풍경을 즐기지 않고 가는 것은 올레길을 부정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어 아낌없이 오랜 시간을 들여 풍경을 음미한다.

이번 여행 중 가장 감명을 준 바다를 하나만 꼽으라면 김녕 바다를 꼽고 싶다. 해수욕장 바다의 신비로운 색상과 성세기 태역길의 원초적 느낌의 용암 바위 위의 진초록 이끼, 잔디, 해조류의 거친 조화는 생명력이란 것을 시각적으로 거칠면서도 몽환적으로 전달해 주었다.

사진을 찍어 친구들에게 가족들에게 이 풍경을 마주하고 있는 나를 자랑한다.

길을 벗어나는 것이 안타까워 해변 바위 위에 걸터앉아 오래오래 강렬한 색상적 대비를 보여주는 푸른 바다와 검은 현무암 바위와 그 위의 진초록 이끼가 만들어 내는 향연을 즐기고 있었다.


얕은 바다 사이의 푸른 이끼 섞인 현무암 길을 조심스레 걸어가는 데 주인과 함께 바다를 산책하던 큰 개 한 마리가 바다로 뛰어들어 수영을 한다. 그 장면이 신기해서 한참을 보고 있는데 물에서 나오더니 긴 털을 요란스럽게 털어낸다. CF에 나올 것 같은 기억에 남는 멋진 장면이다. 잠시 후에 서로 길을 교차하면서 리트리버와 지나쳐 가게 되었는데 늠름한 자태로 멋지게 지나갔다.


산길에서부터 보이던 풍력 발전기를 바다에서 더 많이 보게 된다. 바람의 섬 제주의 다른 모습인 듯하다.




앞선 길의 감동을 안고 걷다 보니 어느새 월정해수욕장을 지나 행원 포구 광해군 기착비 앞에 도착해 있었다. 오늘의 목적지로 생각한 곳이다.

정치권력을 잃고 병자호란을 맞이하는 것을 지켜보고, 유배지가 어딘 지도 모르고 배에 실려 이곳에 던져진, 쫓겨난 왕의 절망감과 분노는 어떠했을까? 광해군에 대해서는 좀 더 자료를 보고 공부를 해서 글로 다루어 보고 싶은 욕심을 가져 본다.




도보로만 이동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오늘 이동 거리를 늘리는 바람에 걸어서 돌아가기가 어렵게 되어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게 된다. 자기의 속도를 알고 거기에 맞춰 적절한 거리에 숙소를 잡는 것이 중요한데, 그게 생각처럼 쉽게 되지 않는 것이 세상 이치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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