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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 길을 걸으면 길이 시작된다. -올레20,21

길을 걸으면 길이 시작된다. 길은 걷는 자의 것이니( ‘걷는 독서'에서)

by 깡통로봇

올레 20코스 중간부터 21코스, + 1코스(행원포구 광해군 기착비부터 성산), 2022년 4월 3일




제주 남원의 팽나무

출발한 지 얼마 안 된 곳에 멋진 팽나무가 서 있다.

팽나무는 제주말로 퐁낭이라고 한다는데, 육지의 팽나무와는 매우 다른 느낌을 준다. 바람 때문일지 한쪽으로 쏠린 듯이 굽은 맛이 있고, 몸체나 가지에서 큰 굴곡과 꺾임을 보여준다. 웅장한 위엄을 보여주면서 사람을 압도하는 맛이 있어서 바오밥 나무가 연상된다.




좋은 사회로 가는 길은 없다. 좋은 삶이 곧 길이다.

19코스와 20코스의 숲길을 지날 때는 박노해의 걷는 독서 문구들이 표지판으로 세워져 있는 데, 언제 봐도 좋은 문구들을 접하게 되어서 참 반가웠다. 걷는 게 조금 힘들다는 느낌을 받을 때 단비와 같은 느낌이랄까. “좋은 사회로 가는 길은 없다. 좋은 삶이 곧 길이다.”라는 문구는 특히나 평소에도 많이 고민하던 문제였는데, 다시 돌아보고 생각하며 걸을 수 있어서 특히나 좋았다. 사회의 변화를 만들어가면서 시스템의 변화와 구성원들의 의식 변화 중 무엇이 더 선행되어야 하고 결정적인 것인가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고 논의했던 문제인 데, 시기에 따라 스스로도 생각의 무게 중심이 바뀌기도 하는 등 쉽지 않은 문제여서, 젊은 날엔 고민도 논쟁도 많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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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노동의 새벽”을 접하면서 알게 된 박노해 시인에게서는 글과 활동에서 감명을 받는 것이 많았는데, 걸으며 책의 문구들을 접하고 생각하게 되니 좋다. 그런데 표지판 글이 점점 많아지고, 인용 문구도 좋은 훈계의 느낌이 드는 글들도 나타나 경구(警句)의 느낌을 받게 되니, 그 숫자가 생각의 여유를 가질 만큼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잠시 하게 된다.




길을 걷고 있는데 사이렌 소리가 울려온다. 4.3을 추념하는 시간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란 생각이 들어 잠시 묵상을 하면서 국가 폭력의 피해자들을 추모한다.


한동 평대 등의 한가롭고 평화로운 마을과 세화를 지나 세화 오일장에서 식사를 하고 싶었는데 장이 서는 날이 아니라 문을 연 곳이 없다.

벵듸길이라는 낯선 명칭이 나와 살펴보니 넓은 뜰이라는 뜻의 제주말이라고 한다. 평대리의 제주말이 벵듸인데 해안에서부터 중산간 지대까지 넓은 평원지대를 이루고 있는 마을이다. 세계 최대의 비자나무 군락지 비자림도 평대리에 속해있다.

평대 마을의 집들은 집안이 낮게 깔린 것 같아 안정감이나 편안함이 더 많이 느껴졌는데 바람이 심해도 잘 버틸 수 있는 구조인가 하는 생각을 해 봤다.




해녀 박물관을 지나, 올레 21코스 안내센터에 들러 올레지기님에게 물어보니 여길 통과하면 한참 동안 마땅히 밥을 먹을 곳이 없다 하여 조금 이르지만 밥을 먹고 가기로 하고 길을 돌아 식당을 찾아 들어간다. 한식 뷔페식당(효도 뷔페 해녀박물관점) 인데 11시부터 한다고 되어 있어 시간을 확인하니 10시 50분, 혹시 영업을 하는 가를 물어보니 들어오란다.

아직 준비가 조금 덜 되었는데 먼저 나온 것으로 식사를 하면서 계속 가져다 먹어도 된다고 하여 음식을 떠서 식사를 시작하는데, 오늘 이 식당은 4.3을 추념하는 의미로 희생자의 후손 분들이 식사를 제공한다고 한다. 제주의 아픈 역사를 생각하면서 항상 내가 빚을 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인데, 식사를 대접받다니 이것 참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할지가 막막한다. 이렇게 마음의 빚을 또 하나 지고 간다. 진상규명과 희생자들과 유족들에 대한 명예 회복이 제대로 빨리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하고 길을 떠난다.




올레 21코스의 밭길은 제주의 속살을 걷는 느낌을 주는 길이다. 밭길을 지나 마을 돌담길을 지나게 되면서 ‘아하! 이래서 올레라는 명칭이 붙여진 거지’하고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올레는 큰길에서 집까지 이르는 돌담으로 쌓은 골목을 의미하는 제주어라고 한다.)



별방진은 왜구를 막기 위해 진을 설치하고 쌓은 성인데, 성곽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을 복원을 했다고 하는데 다른 곳에서 본 돌 성곽보다 규모가 확실하게 느껴진다.

성곽과 마을을 지날 때 지나쳐 가는 젊은 여성 올레꾼의 발걸음에서 경쾌함을 느낀 것은 슬슬 스틱을 집은 왼손의 팔뚝 부분에서 살짝살짝 거북함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올레길도 포장이 된 길을 꽤 걷게 되는데, 이런 데서는 스틱을 통해 반발력이 조금씩 전달되어 누적이 되어간다. 그래서 잠시 스틱을 접어서 넣고 팔을 풀어주면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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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봉을 가는 밭길은 밭을 둘러싼 돌길과 유채꽃의 조화가 청산도의 느낌을 만들어내기도 해서 가면서 계속 뒤를 돌아보며 가게 되었다.




그리고 급경사의 악명이 높은 흙길로 올라가게 되는 지미봉의 초입을 지나 숨이 차올라 거칠어질 무렵, 절정의 경치를 보여주는 지미봉 정상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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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에 딱 맞게 ‘세상에 이런 경치 전망을 보여주는군요.’

사방으로 막힘이 없는 조망에 동쪽으로 우도와 성산 일출봉을 푸른 제주의 바다 선으로 끌어들여 양 옆으로 수문장처럼 세워 놓고 있다. 봉우리 아래의 종달리 마을의 밭들이 노란 유채꽃과 검은 흙밭과 희고, 푸른 형형색색의 꽃과 잎과 풀들의 향연으로 땅 위에 자수를 박아 놓은 듯하다.

아래 전망대로 내려와 사진을 찍고 등산화와 양말을 벗어 잠시 햇볕에 말리고 발에도 바람을 쐬어 준다.

봄볕의 따뜻함과 살랑이는 바람이 느긋함과 행복감을 한껏 부풀려준다.




지미봉을 내려와 종달항을 거쳐 우도와 일출봉을 바다 건너에 놓고, 종달 바닷길을 걸어 코스의 마지막 지점에 도착했다. 시간이 애매하게 남았다. 2시 반이 채 안 됐으니. 어쩔까 하다가 1코스를 거꾸로 걸어가다가 숙소를 잡고 짐을 내려놓은 다음 1코스 시작점까지만 갔다 오기로 하고 종달 마을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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