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되새기는 "놀멍, 쉬멍, 걸으멍"
숙소를 미리 잡아 두지 않은 것이 화근이다.
숙소를 잡아 두었으면 21코스까지 걷고 숙소로 이동을 했을 것인데, ‘일요일 저녁이니 숙소 잡기가 어렵겠나’ 하고, 걷고 나서 생각하기로 한 것인데, 이게 좀 더 걷고 싶은 마음과 결합이 되면서 이상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20코스 중간 행원포구 광해군 기착비에서 21코스까지 하면 21km 정도를 걸은 건데, 아침 일찍부터 걸으니 시간이 많이 남았다. 그러면 쉬면서 가져온 책도 읽고 어슬렁어슬렁 동네 구경도 하고 차도 마시고 하면 좋으련만, 걸어온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더 걷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난 것이다.
올레 시작점인 1코스를 거꾸로 걸어가다가 숙소를 잡고, 짐을 내려놓은 다음 1코스 시작점까지만 갔다 오기로 마음을 정했을 때만 해도 무리하지 않은 정도의 계획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걸어가면서 잡으려고 했던 숙소를 놓치고 지나가면서 마음이 조금씩 변하게 된 것이다. ‘갔다가 이쪽으로 어떻게 오지?’, ‘걸어오기 조금 불편하겠는데.’ 이러다가 ‘시작점인 시흥초등학교에서 이쪽으로 오는 거하고 성산으로 가는 거 하고 거리가 거의 비슷하지 않을까?’(절대 그렇지 않다) 라는 생각이 들자 급격하게 ‘그래, 그러면 이리로 돌아서 오지 말고 성산까지 가자.’라고 마음을 먹게 된 것이다.
살면서 이런 상황을 조심해야 한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상황이 닥치면 항상 그 덫에 걸리며 살아가니... 참~)
이런 게 뭐가 문제냐 하면, 마음을 바꾼 대로의 결과에 충분히 도달할 수 있다. 아니 더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걸 왜 하느냐를 잠깐 망각한 상황이 되는 것이다.
알오름과 말미오름(두산봉)에까지 이어진 길은 목적지를 향해 빨리 통과해 지나가야 하는 길이 되었고, 알오름과 말미오름에 올라서는 ‘어, 경치 좋네. 근데 아까 지미봉에서 본 풍경과 비슷하군.’ 이런 감정 상태를 가지게 되니 문제인 것이다.
놀멍 쉬멍 걸으멍 하려고 올레길에 와서는 길을 통과 목적으로 가게 되어서는 무엇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더구나 길을 서두르면서 물통이 거의 비었다는 것도 오름 위에서 목이 마른 상태가 되어서야 알게 된다.
즐겨야 할 것을 즐기지 못하고 일처럼 만들어 버린 상황을 해외여행을 다닐 초창기에 자주 만들었었는데, 어렵게 시간을 만들어서 왔으니, 하나라도 더 보고 싶은 욕심에 시간을 쪼개어 계획을 잡고 바삐 움직여 다니다 보면 몸이 녹초가 되고 나중에는 본 것이 기억에도 잘 남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성실이라 것을 최고의 가치 중 하나로 알고 살아왔고, 아파도 학교엔 꼭 가서 개근상을 타는게 미덕이었던, 사회에 나와서는 가정보다도 직장이 더 우선시 되던 시대를 지나 왔으니, 무엇이든 덮어놓고 열심히 하는 것이 몸에 붙어 있기도 할 것인데...
이제 미술관을 종횡무진 뛰어다니듯 누비고 다니던 시기를 지나, 앉아서 오래 보며 즐기는 여유가 생기기도 했는데...
시흥초등학교에서 해안도로로 붙어서 성산까지 걷고 나서 숙소로 들어가기 전 편의점에 들러 맥주 한 캔을 하면서야 오늘의 무모함을 반성한다. 올레의 시작점이고 자랑인 1코스를 제대로 즐기며 걷지 못했다는 자책을.
깨달음이 느리면 몸이 고생을 한다. 보람도 별로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