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걷는 올레, 제주어교실, 수월봉, 차귀도
아침을 든든히 먹고 (야채, 고기를 섞은 계란으로 속을 만든 토스트와 누룽지를 정성스레 준비해 주신 여사장님에게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어제 픽업도 해 주시고, 도착하자 따뜻한 차도 내어 주시는 배려에 무한 감동을 느낀다) 아침 길을 나선다.
무릉 외갓집이 이전을 하여 지난 4월 달에 11코스를 걸어왔을 때와 출발지점이 조금 바뀌었다.
좌기동을 지나가면서 무릉도원 학당의 제주어교실을 만난다. 시간이 된다면 한 번 교육을 받아 보고 싶은 생각이 드는 공간이다,
흔히 우리는 지역어를 방언, 사투리라고 부르고 표준어에 비해 평가 절하하는 경향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 평생을 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해오면서 나 스스로도 이런 경향성을 강화해 오고 또 은연중에 그런 인식을 확산하는데 일조를 했으리라. 그런 반성의 마음을 담아 사진에 담아 본다. 제주어교실.
얼마 전에 방영했던 ‘우리들의 블루스’라는 드라마에서 제주어를 반영한 대사들을 꽤 사용하여 그나마 아주 조금 익숙해지긴 했지만 단어 수준을 넘어가면 제주어는 익숙하지 않다.
아방, 어멍, 혼저 옵서(빨리 오세요), 폭삭 속아수다(매우 수고하셨습니다) 같은 말이 그나마 알려져서 익숙했는데 드라마를 통해 무사?(왜?) 경(그렇게) 등의 말을 조금 접하게 되었다.
지역의 문화가 중앙에 복속되어 다양성이 허물어지고 있는 시대에 문화적 특색을 가장 잘 담고 있는 지역의 말들이 생명력을 유지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제주어는 소멸 위기 언어에서 심각 단계에 처해 있다고 하는데, 제주어 대사전 편찬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니 보전을 위해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절이 어느덧 가을로 접어 들어가는 것이 완연히 느껴지고 밭에는 보리가 누렇게 익어가기 시작한다. 지난 4월 올레를 걸을 때 청보리 물결을 보여주던 그 놈들이다. 두 개의 기억과 겹쳐지며 시간의 흐름을 눈으로 확인한다.
제주 뜰은 걷이를 향해가는 것들과 새로 파종하는 것들이 섞여 마무리와 시작이 공존하는 공간의 이채로움을 보여준다.
파종을 위해 트랙터로 갈아놓은 밭과 양배추, 브로콜리, 파 등을 얼마 전에 심어 놓은 밭과 무리를 지어 앉아 마늘을 파종하는 밭들을 지나간다. 마늘 심는 모습에 잠시 발길을 멈추고 바라보고 있으니 아저씨 한 분이 다가와 내년 오월에 걷어들을 것을 심고 있다고, 어디서 왔냐고, 어디까지 걷냐고 이것저것을 묻는다.
서울서 와서 올레길을 며칠 걸을 예정이라고 하니, 아주머니들이 듣고 가을날 놀러 갔던 이야기들을 시작하며 유쾌하게 웃으며 일을 하신다.
프로펠러 소리가 나서 쳐다보니 큰 드론을 이용하여 양배추를 모종한 밭에 농약을 뿌리고 있다. 농사에서도 이렇게 일손을 줄이기 위해 첨단기계가 사용이 된다. 많은 인원이 마늘을 심고 있는 모습과는 대조되는 풍경이다.
그러고 보니 제주의 밭을 지나면서 계속 스프링 쿨러가 뿜어대는 물줄기를 보면서 지나왔던 것이 생각난다. 단순한 장치를 통해서 사람의 손이 덜 가게 만들면서 농사가 이루어진다.
밭이 있는 들판 길을 지나 정말 낮은 작은 오름 녹남봉을 오른다. 녹나무가 많아서 붙은 이름라고 한다. 항상 작은 오름을 오를 때 생각보다 힘이 든다. 표고 100m라는 안내를 보고 그냥 한 달음에도 뛰어올라가는 것 아닌가 하고 쉽게 생각하는 마음 때문인 것 같다. 언제나 평정심을 갖고 제 페이스로 가는 게 필요하다는 작은 깨달음을 가지고 간다.
오름을 오르면 항상 멋진 전망을 기대하는데 나무가 많아 시야가 넓게 터지지 않다가 전망대에 오르니 지나온 길과 갈 길을 한눈에 엮어볼 수 있다.
녹남봉을 내려오면 바로 폐교된 학교를 활용하여 도자기 체험장으로 만든 산경도예가 나온다.
학교 외관이 크게 바뀌지 않아 폐교된 학교 느낌이 많이 남아 있는데, 폐교가 주는 고즈넉한 쓸쓸함이 느껴진다. 아이들이 놀았을 잔디 운동장을 일없이 서성거리다가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 동상 옆으로 서 있는 동상에 눈길이 간다. 지난 시기 반공 교육의 상징처럼 사용되었던 이승복 어린이 동상이다. 분단 독재 시대의 유산으로 아홉 살 소년의 비극적 죽음을 반공 이데올로기의 강화를 위해 이용했던 지난 시기의 어두웠던 면을 보게 되니 참 씁쓸한 기분이 든다.
넓게 밭이 펼쳐진 길을 따라 가는데, 밭 한가운데 커다란 팽나무가 서 있다. 마을이나 길 가운데 있는 것과는 느낌이 달라 눈길이 머문다. 쓸쓸한 것도 같고 신비로운 것도 같은... 낯선 곳을 지나가는 여행자의 눈에는 남들의 일상이 모두 새롭다.
올레길은 다시 바다와 만난다. 바다가 가까워지자 소금기 머금은 비릿한 바다 냄새가 기분을 들뜨게 한다.
야생의 감각을 일깨워주는 거칠게 물결치는 듯한 현무암의 해안가를 따라 걷다가 하멜 일행 난파 희생자 위령비를 만난다. 일반적으로는 산방산 아래 용머리 해안에 하멜 상선 전시관과 하멜 기념비가 있어서 그곳이 하멜 일행이 표착한 곳이라 생각을 하는데, 신도리에서는 제주목사로 재임했던 이익태의 지영록 기록과 하멜 표류기의 삽화 등을 근거로 신도 2리 해안이 하멜 표착지라는 주장을 하고 있어, 이곳에 위령비를 세운 것이다. 이런 논란은 역사적 고증을 통해서 해소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이와 유사한 여러 경우처럼 역사적 유산을 지금의 관광유산으로 사용하고 싶은 지역들의 주장은 쉽게 해소되기 힘든 문제일 것이다.
걸음은 12코스에서 가장 멋진 조망을 보여주는 수월봉을 향해 간다.
넓은 들판의 밭마다 먹거리들이 자라나고 심어지고 있어 먹고 있는 많은 부분을 여기에 빚지고 있음을 생각하는데, 밭 돌담에 죽 늘어선 원형 부표를 이용한 화분이 눈에 들어온다. 윗부분 일부를 잘라내어 개구리처럼 만들었는데 다육이들이 심어져 있어 마치 개구리가 곤충을 잡아먹는 듯한 모습이 연출된다. 모양도 보기 좋지만, 사용하고 난 원형 부표를 다양하게 재활용하는 모습이 더 좋게 느껴진다. 걷다 보면 이런 장면을 자주 접하는데 이런 게 그냥 이루어졌을 리 없다. 누군가의 아이디어와 노력에 힘입은 것일 터이니 그 노력에 감사를 표한다.
바다에서 매우 유용하게 많이 사용되는 원형 부표는 스티로폼 부표를 대체하면서 사용되는 것이지만 결국에 플라스틱이라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플라스틱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성능 조건을 만족시키기에도, 일정한 모양을 성형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어 사용한다고 하는데, 많이 사용되는 만큼 나중에 처리가 만만치 않아 보인다.
농사를 지을 때도 밭에 작물의 성장을 위해 비닐로 멀칭을 하면 잡초를 방지하고 토양의 수분을 보존하고 흙의 유실이나 침식을 방지하는 등의 좋은 효과가 많지만, 사용된 후의 비닐은 완전 처리가 쉽지 않아 다니다 보면 들판에 비닐이 휘날리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편하게 사용하지만 그것을 안전하고 깔끔하게 처리하는 것은 큰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수월봉은 제주의 가장 서쪽에 있는 봉우리인데 그런 이유로 기상대가 세워져 있다. 특색 있는 기상대 건물이 멀리서부터 눈에 확 들어오는데, 오르다 보니 높이 솟은 건물과 누렇게 변한 키 큰 풀숲이 어우러져 계절감을 느끼게 해 준다. 포장된 길을 놓고 풀숲 사잇길을 따라 올라가며 가을 느낌을 만끽해본다. 수월봉은 그리 높지 않은 오름이지만(해발 77m라고 적혀있다.) 빼어난 전망을 자랑한다.
앞바다에 손에 잡힐 듯이 차귀도가 있는데 수월정에서 보는 차귀도로 떨어지는 낙조는 아름답다고 소문이 자자하다. 해가 하늘 가운데 있으니 다음 언젠가를 기약할 수밖에 없겠다.
동쪽으로 머리에 구름을 얹은 한라산과 동남쪽의 산방산 모슬봉 등, 서쪽 지역 전체가 시원스레 조망이 된다.
성당에서 문화기행을 하는 팀이 수월정에 올라 기념사진을 찍고 인솔자 분이 주변 지형과 수월봉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안내하고 있는데, 일행 중의 수녀 두 분이 조금 떨어져서 사진을 찍고 계신 데, 연세가 있으신 수녀님은 연신 사양의 말씀을 하시는데 젊은 수녀분이 여러 말씀으로 촬영을 유도하며 찍는 장면이 정감 있게 다가온다.
어머님을 모시고 여행을 가면 항상 이젠 나이 들어 사진은 그만 찍는다고 하시는데, 손자 손녀들이 같이 찍자 하면서 모시고 가면 못 이기고 곱게 웃음 지으며 자세를 잡으시곤 한다. 연세 드신 수녀님의 모습이 더 정겹고 흐뭇하게 느껴진 이유가 그러하다.
수월봉을 내려가 엉알길의 멋진 절벽길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공사 중이라고 우회를 시킨다. 켜켜이 쌓인 물결치는 듯한 절벽의 장관도 입구에서 살짝만 보고 녹고의 눈물도 만나지 못해 아쉬운 마음을 안고 우회로를 따라 차귀도 포구로 들어간다.
포구에는 오징어를 걸어놓고 말리는 건조장이 퍽 멋있는 장면을 연출한다.
차귀도로 들어가는 배편이 있어서인지 낚시를 하러 가는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이동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걸어오느라 목이 말라 슈퍼에 들어가 음료수를 마시려다가 앞에 가던 올레 일행이 한치 구이에 맥주를 시키는 것을 보고 나도 맥주 한 캔을 사 가지고 선착장 옆으로 가서 오징어 말리는 너머로 보이는 차귀도를 감상하며 시원하게 목을 축인다. (오징어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으니 보는 것으로 안주를 삼는다.)
누군가 옆에서 느닷없이 올레길 모바일 패스포트를 구매를 했는데 어디서 확인을 해야 하는 지를 물어본다. 잠시 머뭇거리다 시작점, 중간지점, 종점에서 찍는다는 것을 알려주는 데, 그럼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물어본다. 어느 쪽을 목적으로 하느냐고 물으니, 그냥 올레길을 걸으려고 한다고 하니 잠시 어떻게 안내를 해야 할지 난감하다. 정 올레 방향을 알려주고 거리가 얼마 안 남았으니 가서 찍어보고 결정을 하라고 안내해 주었는데, 이 올레꾼과는 저지오름에서 다시 조우를 한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며 걷다 길을 놓쳤다. 가족이나 친구들과 같이 오면 저런 카페에서 경치 구경하며 커피 마시기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그 지점에서 왼쪽으로 들어갔어야 하는데 그만 그냥 지나가고 말았다. 큰 도로 교차로를 지날 때 리본을 확인했다고 생각했는데 돌아가다 보니 다른 길을 안내하는 리본이 걸려 있다.
길을 잘못 들어서 얻은 수확이 있다면 도로 옆 알록달록한 철살 담장을 가진 학교가 운동장이 예뻐서 쳐다보다가 우연히 운동장 한쪽에 서 있는 동상을 보게 된 것이다. 이순신 장군상 옆에 있는 동상은 아까 폐교에서 봤던 것과 같은 이승복 어린이 동상이었다.
깔끔하게 잔디 깔린 운동장에 잘 단장된 조경수와 단정한 건물과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분단 독재의 이념 선전의 잔재가 대비되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확 올라온다.
당산봉 옆을 지나 생이기정길을 지나는 길은 왼쪽으로 차귀도를 끼고 걷다 뒤로 놓고 걷다 하는데, 보는 위치에 섬의 달라지는 여러 모습을 보면서 걷는 맛이 좋다. 포장도로를 걷다가 이렇게 흙길을 걷게 되면, 걸으면서 느끼는 행복감이 부척 높아지는데, 자꾸 돌아보게 되는 경치가 청명한 날씨에 펼쳐져 있으니 더할 바 없는 만족감에 콧노래를 절로 흥얼거리며 간다.
차귀도는 몇 개의 섬을 묶어 부르는 명칭인데,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 하고 관광객들과 낚시꾼들이 주로 찾는다는데, 섬과 관련된 여러 전설이 전해 진다.
* 장군바위 전설 - 오백장군의 어머니인 설문대할망은 아들들 먹일 죽을 끓이던 솥에 빠져 죽었다. 형제들이 먹은 것은 어머니의 피와 살로 쑨 죽이지만, 막내가 본 것은 어머니의 유골이었다. 형들이 미운 막내는 차귀도로 날아가 돌이 되고, 형제들도 비통한 심정을 가누지 못해 영실 절벽에 떨어져 바위가 되었다.
* 매바위 전설 - 중국 송나라 조정에서 제주가 풍수지리가 좋아 유능한 인재가 많이 태어날 것을 시기하여 호종단에게 제주의 지맥을 끊으라는 보냈는데, 제주의 지맥과 수맥을 끊고 다니던 호종단이 산방산 아래 와룡 형상이 왕의 기운이 배어 있는 명당이라 여기고 무쇠 침으로 용의 가슴을 찌르니, 시뻘건 피가 솟구치며 승천을 기다리던 와룡이 화산과 같은 피를 토하며 죽었다. 와룡의 몸에서 솟구치던 피가 굳어져 사계리의 용머리 바위가 되었다. 이런 만행을 뒤늦게 안 한라산 신이 매로 변해 호종단 일행의 배를 침몰시켰다. 그래서 이곳이 돌아가는 길을 막았다는 뜻의 차귀도라 불리게 된다.
갈색 머리의 서양 젊은이 하나가 뛰어 지나가다 뒤 돌아 이리저리 구도 잡아가며 섬 사진을 찍고는 또 부지런히 뛰어가는데 슬리퍼를 신고도 잘 뛰어가는 모습이 신기한데, 몇 번을 만나고 지나치고 하게 된다.
용수리 포구에 들어가다 보니 앞에 성 김대건 신부 제주 표착 기념관과 성당이 보인다. 중국에서 오던 중 풍랑으로 이곳에 표착하여 처음으로 미사를 하게 되었다고 하니 천주교인들에게는 의미 있는 장소가 될 수 있겠다.
오전의 걸음을 마무리하며 식사를 할 만한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며 13코스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