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잔에 물을 따르며

by 깡통로봇

화분에 물을 주니

늘어졌던 잎들이 제 숨을 찾아간다


전보산대를 어지러이 가로지르는 가로세로 선들이 한 마디씩 던지는 넋두리는

구원을 바라는 손짓,

그냥 그렇다며

축 늘어져 돌아가는 뒷모습 위로

반짝 등 하나 달아줄 일이다.

오는 길이 보여야지.


긴 비 끝에

스며들어온 습한 공기가

세상을 숨겨 둔

검은 활자들에

음습한 비린내를 뿌리면

우산에

통통 튀어 오르는

신선한 소리를 들으려

너에게로 간다


내 어머니는

이리 더운 날에

날 낳아 먹이셨구나


골목길을 한 바퀴 돌아

여섯 잔의 물을 마시고 나니

하루가 저물었다


길 위에 한 방울씩

촘촘하게 기억을 새겨 넣던 빗줄기


바늘이 한 땀 한 땀

시간 속을

비비며 스며들어

천 속을 뚫고 지나가면

새겨진 생채기들로

실이 흘러들어

마음의 옷이 되고

관계 맺은 이불이 된다.


빗물이 기와지붕 위를 흘러 암막새 끝에 닿으면 화려한 비상이 시작된다.

무거운 세상으로의 끌림은 짧은 순간에 끝이 나지만

긴 여행을 시작하는 떨림은 방울져 뛰어오른다.


따갑게 익어가는

바쁜 걸음에

선선해진 바람이

쉬어가는 숨을 주면

조각난 시간들이

바람에 펄럭이며

엮이고 묶여

꽃 떨어진 자리마다

열매 하나씩 단다


숨을 고르고

작은 새 잔에 물을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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