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수 있는 어른

누굴 얘기해 줘야 하나

by 한희

초등학교 4학년 교실에서 있었던 일이다.


성폭력 예방교육 시간이었는데 수업이 끝나고 설문지를 돌리기 전에 습관처럼 '질문 있는 사람~ 물어보세요!'라고 물어봤다. 보통은 마지막에 질문이 많지 않다. 끝나는 시간이 늦어질까 봐, 황금 같은 수업시간이 날아갈까 봐 그냥 설문지에 적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학생은 좀 특별했다.


'선생님! 이 질문은 꼭 모든 친구들이 듣는 곳에서 하고 싶었어요! '


무슨 질문인지 몰랐지만 한편으론 반갑고 또 한편으로는 걱정이 됐다.


이야기를 요약해 보자면, 3학년 때 자기를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친구가 있었단다. 그래서 하지 말라고 여러 번 얘기를 했는데 소용이 없었고 참다못해 학교폭력 신고함에 그 친구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써서 도와달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도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그렇게 4학년이 되었다며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교장 선생님, 담임 선생님은 왜 가만히 계셨냐고 원망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수업 내내 뒤에 앉아 계셨던 4학년 담임 선생님께서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나를 빤히 바라보기 시작하셨다.


이 질문은 참 답하기 어려운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학교 사정을 잘 모르는 내가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도 문제가 있고 아이의 말만 듣고 누군가를 비난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단 한 가지는 확실했다.


아이는 '믿을 수 있는 어른'에 대해 이미 불신을 가득 안고 있었고 그것을 친구들에게 외치고 있었다.


' 너희들은 얘기해도 보호받지 못할 것이다. 너희들을 돕는 어른은 없다.'


이 얘기를 들은 누군가는 말할지 모른다.


'왜 그 얘기를 외부 강사한테 하는 거야? 40분 왔다가는 사람에게 말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다고.
성폭력 예방 교육시간이지 학교 폭력 예방 교육시간이니?
친구들끼리 싸울 수도 있지. 그건 네가 직접 해결해야지 매번 어른들한테 도와달라고 하면 어떻게 해? '


하지만, 이것은 내가 받아야만 하는 질문이 맞다고 생각한다.


1. 어른의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받지 못했다면 여러 어른한테 말해라.

도움을 받지 못한 경험이 반복되면 무기력해지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비합리적 신념을 갖게 될 수 있다. 그런데 이 학생은 학교 안 선생님들이 안되니까 외부 어른에게 이 얘기를 하고 있다. 그래서 결국 원하는 답은 아닐 수 있지만 자신이 이해할 수 없었던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2. 말해봤자 소용없다? 말하면 속이 후련해진다.

속앓이 하던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얘기했고 공감받았으며 또 다른 대처방안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 외부 세계는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 학생의 삶에는 큰 변화의 시작이 될 수 있다.


3. 성폭력과 학교 폭력 예방 교육은 같은 교육이다.

성폭력만 강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강사였다면 괴롭힌다는 친구가 성기를 만지거나 성기를 보여달라고 했는지 물었을 수 있다. 난 항상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다. 성교육을 강의하는 사람들은 음경과 음순에 대한 얘기만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폭력이 사라진 교실에서 어떻게 성폭력이 벌어질 수 있을까? 글을 읽지 못한다고 놀리고 있는 친구를 보고 하지 말라고 말하는 아이들, 괴로워하는 친구를 보호하고 돕는 아이들이 있는 교실에서 성희롱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성폭력 예방교육에서는 피해를 입었을 때에는 믿을 수 있는 어른에게 말하라는 부분이 나온다. 그런데 보호받은 경험이 없는 아이들이나 말해도 소용없다는 결론을 내린 아이들은 누가 믿을 수 있는 어른인지 알 길이 없다.


4. 힘은 보호를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아이들끼리 해결하면 정말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잘 안될 때 도움을 요청하면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연습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어른이다. 그리고 긴급한 상황이라면 보호를 위한 힘을 발휘해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은 힘이 약한 사람을 괴롭히고 착취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보호와 도움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는 점을 배우게 된다. 처벌을 위한 힘이 아닌 보호를 위한 힘을 생활에서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알림과 고자질의 차이를 배우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시간이 많지 않아서 아이의 억울함과 답답함에 깊은 공감은 하지 못했지만 어떤 감정이었는지를 나누는 시간을 짧게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학교폭력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던 시간들을 회상하며 모든 선생님들은 분명히 알고 계셨고 주의 깊게 보셨을 것이라는 점을 얘기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결됐고 진행되고 있는지를 보고 받지 못한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라는 점, 그리고 담임 선생님이나 교장 선생님의 보호가 학교 구석구석에서 이뤄질 수 없을 수 있으므로 우리의 연대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줬다. 친구들은 늘 곁에 있으므로 교장선생님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고 우리가 힘을 모아서 서로를 지켜주는 것도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수업시간에 만난 아이들은 자신이 성폭력 신고를 했는데 왜 진행 상황이 보고되지 않는가에 대해 의아해했다. 아이들의 신고는 얼마나 쉽게 무시되고 자신도 모르게 처리되는지 안 봐도 어느 정도 예상이 된다. 그리고 상황이 가볍다는 이유로 어른들이 웃고 넘기는 사례들 안에서 아이들은 작은 무기력을 학습한다.


하지만 그런 질문을 받았을 때

'세상이 다 그래~ 그런 서비스는 없어. 힘 있는 사람들만 보고를 받는단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내가 수업시간에 할 수 있는 것은 '그건 잘못된 거야, 너에게 어떻게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말해줘야 해. 가서 다시 한번 물어보자!'라는 말뿐이다.


'넌 틀렸어, 왜 유난을 떠니?'라고 말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아니야, 그럴 수 있어. 힘들었겠다.'를 말하는 어른이 하나는 있어야 자신을 의심하고 스스로를 비난하는 일을 멈출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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