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도 빼도 계속 나오는 빨대를 보니 저절로 비명이 나왔다. 보는 사람도 이런데 피를 흘리며 빨대를 뽑고 있는 거북이는 오죽했을까.
4살 아이와 영상을 보며 괴로워하다가 작은 결심을 했다.
우리 이제부터 빨대 쓰지 말자
그래 엄마! 우리 거북이 구해주자.
그렇게 빨대 쓰지 않기 운동을 했다. 스텐이나 실리콘 빨대를 쓰고 특히 얇은 빨대를 사용하는 요구르트는 뚜껑 열고 먹기를 했다. 그리고 빨대를 쓰지 않을 때마다 아이는 내가 거북이를 구한다면서 좋아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제는 물티슈도 쓰지 않기로 했다. 저녁을 준비하면서 행주로 밥상을 닦고 있는 나를 보더니 남편이 말한다.
뭐야? 물티슈는 어디 있어?
이제 없어. 안 살 거야. 물티슈가 환경을 오염시킨대.
큭, 얼마나 가나 보자.
우리는 1년 넘게 물티슈를 끊었고 항상 물티슈를 찾던 남편과 아이들도 이제는 더 이상 찾지 않는다. 나는 대신 매일 행주를 삶고 걸레를 빠는 습관이 생겼다. 가끔 번거롭고 귀찮지만 그 행동을 할 때마다 나 이외의 다른 생명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기쁨이 있어서 계속할 수 있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할 때면 꼭 옆에서 비난이나 비아냥거림으로 사기를 꺾는 경우가 있다.
' 야! 네가 그렇게 한다고 세상이 바뀔 것 같아? 그냥 하던 데로 하고 살아. 얼마나 하나 보자~ '
다이어트를 한다고 하면 '또? 야 어차피 일주일도 못 갈 거 그냥 대충 살아'
텀블러 들고 카페 가면 ' 너 참 피곤하게 산다'
분리수거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며 ' 네가 그런다고 환경오염을 막을 수 있을 거 같아?'
그런 말을 들으면 마음속에서 이런 말이 들리기도 한다.
'내가 너무 유난 떠나? 하긴 내가 매번 포기하지, 나만 잘하면 뭐해 다른 사람들은 그냥 막 버리는데.'
하지만 이때가 그들에게 내 삶의 주도권을 건네주는 순간이다.
그것은 그들의 생각이지 나의 생각이 아니다. 그런데 나의 생각의 주도권을 그들에게 주는 순간 그들의 생각이 나의 생각이 되어 버린다.
너 진짜 피곤하게 산다라는 말을 자주 하는 지인이 있다.
그럼 나는 얘기한다.
맞아, 인생은 피곤한 부분도 있지. 인생을 쉽게만 살 수는 없어.
그럼 한숨을 쉬며 상대는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전에는? 싸우거나 자기 비난에 빠졌다. 하지만 더 이상 타인의 생각과 싸우지 않는다. 그냥 단호하게 내 삶의 원칙을 말하고 그것을 실천할 뿐이다.
얼마나 가나 보자고 했었나? 1년 넘게 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거다.
누가 아냐고 했나? 내가 안다.
세상이 바뀌냐고 했었나? 내 삶이 바뀐다. 나하나 바꾸는 것도 힘든데 무슨 세상을 바꾸냐.
매번 포기한다고? 포기가 두려워서 도전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
자기 확신은 내가 나를 알고 믿는 것이다. 스피치학원이나 이미지 메이킹 수업을 들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감 있게 보일 수 있도록 비언어를 연출할 수 있지만 내가 나를 믿는 마음이 없으면 타인의 비난이나 몇 가지 면접 질문으로 쉽게 무너진다. 그럼 자기 확신은 어디서 생기는 것인가? 이룰 수 없을 것만 같은 거대한 목표를 달성했을 때도 물론 '나는 해내는 사람'이라는 자신감이 생길 수 있다. 하지만 항상 원하는 것을 달성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나는 안전한 자기 확신을 좋아한다. 내 삶의 작은 습관들과 행동, 말이 나의 가치를 반영하고 정체성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설계해 놓는 것이다. 그러면 주변에서 나를 판단하는 이야기를 하더라도 쉽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고 소신 있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다. 물론 그런 얘길 들었을 때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단호하게 나의 생각을 말하는 날 볼 때면 뿌듯하다. 그래서 그런 얘기를 듣는 날이면 간혹 반갑기까지 하다.
'네가 나를 기억하게 해 주는구나.'
이 훈련이 어려서부터 잘 된다면 나의 인생이 바뀌는 것뿐만 아니라 타인의 생명을 구할 수도 있게 된다.
나의 말한 마디로 친구의 마음을 구할 수 있다.
타인의 몸을 함부로 만지지 않는다.
외모를 가지고 평가하며 놀리지 않는다.
동의 없는 촬영과 유포는 범죄다.
온라인 상에서 만난 사람에게 신상정보나 사진을 보내지 않는다.
성폭력 예방 교육에서 아이들에게 교육하는 내용이다. 가해자가 되지 않고 누군가 위와 같은 행동을 했을 때 그것이 폭력임을 빠르게 인지하고 대처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이다.
그런데 이 수업을 하고 교실을 나올 때면 가끔 회의가 든다.
수업 후 복도로 뛰어나온 아이들이 보란 듯이 성희롱적인 말들을 쏟아내기 때문이다.
' 돼지 새끼 같은 게~ 왜 쳐다봐! 넌 좀 맞아야겠다.'
이런 말이나 행동이 수업시간에 벌어지기도 한다. 그럼 주변 아이들은 무기력하게 고개를 돌리거나 귀를 막는다. 이미 여러 번 경험한 일인 듯 무시하고 활동을 하기도 한다. 때론 하지 말라고 소리를 치며 등짝을 때려서 또 다른 폭력을 낳기도 한다.
양육자, 부모님들은 어떤 학교가 안전하고 좋은 문화를 가졌는지 물어본다. 성폭력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던 학교를 찾아서 이사라도 가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수업을 하면서 학교가 아니라 교실의 문화가 아이들에게는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았다. 좋은 문화와 존중의 분위기를 갖고 있는 학교라도 교실 안에 구성원들이 폭력적인 말과 행동을 하고 이를 방관한다면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다른 아이들에게 폭력적인 행동이나 말을 하는 학생은 어느 교실에나 존재한다. 그런데 그런 상황이 발생했을 때 아이들의 반응이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방관자 교실. 친구를 괴롭히는 상황이 발생하고 그것이 나에게 악영향을 주는 경우에도 못 본척하고 어떤 말과 행동을 하던지 내버려 둔다. 공동체와 개인의 경계가 모호해서 힘이 있는 아이들은 그 경계를 계속 시험하고 넘으며 자신의 힘을 확인한다. 학생들은 언제든 자신도 놀림이 대상이 될 수 있으므로 늘 긴장하거나 무기력해져 있다.
두 번째는 방어자 교실. 폭력적인 상황이 발생했을 때 아이들이 힘을 모아서 힘이 약한 아이를 보호하거나 불편하다고 말한다. 학급에서는 폭력에서 구성원을 지키는 분명한 원칙과 행동규칙이 있다. 누군가 하지말라는 말을 했때 주변에서 힘을 보태준다. 넘지 말아야 하는 경계를 계속 알려주고 힘은 약자를 보호하고 나를 지키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라는 원칙을 잊지 않는다. 선생님의 힘은 약자를 보호하고 구성원을 지키는 데 사용된다.
방어자가 있는 교실에서는 절대로 성희롱이나 폭력이 힘을 펼 수 없다. 누군가 외모를 가지고 놀리면 주변 아이들이 바로 움직인다.
돼지 같은 게 쫄바지 입었어~ 소시지다.
너 지금 그거 성희롱하는 거야? 그거 성희롱이야. ->1차 알림
야 돼지한테 돼지라고 하는데 이게 왜 성희롱이냐
외모를 평가하면서 놀리는 것 성희롱이야. 쟤 지금 표정 봐. 괴롭대. 하지 마 -> 2차 알림
웃기시네 너도 당하고 싶냐? 원숭이 같은 게~ 너 엉덩이 빨갛지? 벗겨볼까? 얘들아 재 팔 잡아! 벗겨보자.
주변 다른 친구들,
너 지금 무슨 얘기하는 거야? 지금 진아가 두 번 말했어. 나도 네가 놀리지 말았으면 좋겠어. 우린 세 번째에는 선생님께 보호를 요청할 수밖에 없어. 그게 우리 반 약속이야. -> 방어자 등장
야! 이 배신자들, 고자질이나 하고
이건 알림이야. 우리는 친구를 보호할 책임이 있어. 그만해.
가해자가 되지 않는 교육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 교육을 아무리 해도 누군가를 괴롭게 하는 상황은 계속 발생한다. 힘의 균형은 늘 맞지 않고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약자를 착취하는 것은 어른들도 하는 짓 아닌가? 그들은 자신의 욕구가 채워진다면 타인의 고통은 관심이 없다. 그래서 교육이 중요하다. 이런 행동이 허용된다면 성인이 되어서도 같은 행동이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관자로 구성된 공동체를 학습한 아이들은 사회를 신뢰하지 않고 영원한 방관자로 남을 수 있다.
위의 단어들이 너무 어려워서 실제 사용이 가능할지 의문이 들 수 있다. 하지만 갈등 상황에서 일상어와 다른 성인의 언어를 사용할 때, 즉 낯선 언어와 상황에서 자신을 객관화하기 쉬워진다. 징징거리거나 함께 소리치지 않고 단호하게 말하는 훈련은 지금까지 매우 효과적이었다.
이 대화가 어려운 것은 단어가 어렵기 때문이 아니다. 아이들 각자의 마음의 힘과 신뢰가 필요하고 교실 안에 보호 시스템(교실 원칙, 3회 알림 약속과 보호하는 힘에 대한 선생님의 권위)이 갖춰져야 하기 때문이다.
처음 하지 말라고 말했던 아이는 자신도 공격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자신의 신념과 믿음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두려움을 이겨 낼 수 있는 것은 다른 아이들이 모두 나의 편이 되어 줄 것이라는 확신이다.
처음 아이가 협박당하고 있을 때 힘을 보탠 아이는 내가 이런 말을 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나도 함께 바지 벗김 당하면 어떻게 해?라는 두려움을 이겨내야 한다.
내가 타인을 바꾸고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지금 이 순간에 저 친구의 괴로움을 막아줄 수 있다.
이것이 옳은 일이고 나를 응원해 줄 친구들이 있다.
이런 교실에서 성폭력이 발생할 수 없다. 폭력 자체가 살아남을 수 없다. 이 경험을 한 아이들은 공동체를 믿고 타인과 사회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살아간다.
괜히 도와주려고 한마디 했다가 도와주는 애들 없어서 우리 애도 피해 입으면 어떻게 하냐는 부모들의 걱정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 걱정 자체가 이미 공동체의 신뢰는 깨졌고 인간의 가치는 훼손됐으며 약육강식의 세상이 우리 아이들의 교실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말하는 듯해서 슬프다.
그래서 평소에 아이들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가르치고 약한 생명을 위해 실천하는 연습, 비난에 대처하는 자기 확신 연습을 할 수 있도록 훈련시킨다. 같은 가치관과 철학을 공유하는 부모들끼리 모여서 가정생활에 적용하고 아이들이 일상 안에서 가치관을 잘 키울 수 있도록 돕는다. 마을의 부모가 되어 부모의 손이 자주 가지 않는 아이들과 함께 놀며 경계를 존중하는 관계를 배울 수 있도록 한다. 선생님은 평화에 기반한 교실 원칙을 세우고 일관성 있게 적용하며 선생님도 힘의 불균형 안에서 폭력을 가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감수성이 살아있는 수업을 운영한다. 이렇게 부모, 선생님이 힘을 모아야 용기 있는 한 아이의 말에 힘을 실어주는 친구들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사건만 터지면 교장은 뭐했냐, 담임은 뭐했냐 하면서 비난의 화살을 학교로 돌린다. 그럼 부모는 뭐했냐? 친구 엄마 아빠는 뭐했냐, 마을 사람들은 뭐했냐, 나라는 뭐했냐, 그 얘기하는 당신은 뭐했나? 끝도 없는 비난의 악순환이다. 그들이 잘했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이 연결되어 영향을 미친 결과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이 바뀔 수 있게 싸워야 한다. 그렇게 되길 응원하고 지지하며 지켜볼 것이다. 그리고 나는 매일 나의 가정이라는 작은 사회 안에서 나의 일을 할 것이다. 오늘도 내가 바뀌고 변화한 나와 함께 하는 가족들에게 선한 영향력이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을 담는다.
성교육은 생명 감수성 위에 인권 감수성 위에 성인지 감수성이 쌓여가는 과정이다. 생명과 인권이 자리잡지 못한 교실에서 서로를 의심하고 두려움 안에서 자기 보호만 하기도 힘든 아이들은 이미 권력자와 권력자에게 대응했을 때 내가 당하게 될 불이익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생각을 말하고 나의 신념에 따른 행동을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방관자가 됐던 기억은 성인이 되었을 때까지 정체성에 영향을 미친다. 약자를 보호하지 못하고 눈감았던 기억은 죄책감과 수치심, 무기력함을 안겨주기도 한다. 아이들을 방관을 통해 몸을 지켰을지는 모르지만 마음을 지키지는 못한다. 그 마음을 지키기 위해 눈을 뜨고 말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발생하는 비난과 조롱에 맞설 수 있는 자기 확신을 연습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삶에서 작은 것들을 실천한다.
빨대 하나 안 쓴다고 네가 거북이를 구할 수 있을 것 같아? 피곤하게 살지 말고 하던 데로 살아.
네가 하지 말라고 말한다고 쟤를 보호해 줄 수 있을 것 같아? 걔는 달라지지 않아. 괜히 너도 당하지 말고 그냥 모른 척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