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편이 있나요?

언제나 우리는 한 팀을 외쳐주는 사람

by 한희
Photo by Isaiah Rustad on Unsplash


4학년 수업이 시작되자 맨 앞에서 안경을 쓰고 날 바라보던 아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선생님, 제가 4년 동안 성교육을 들었는데요. 매번 같은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왜 또 왔어요?




난 질문을 좋아한다. 수많은 질문을 받아왔지만 초등학교에서 이런 질문은 처음이었다. 중고등학교 아이들은 뻔한 성교육이 지겹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말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갈등을 만들어서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목받으면 잘 수 없다. 그래서 이래저래 낯선 질문.


분위기가 싸해지고 반 아이들은 나와 질문한 학생을 번갈아 가며 봤다. 그중 몇몇은 이 상황이 재미있었을 수도 있겠다.


이 질문에는 여러 바람과 비합리적 신념이 숨겨져 있다.


1. 바람: 내가 모르는 깊이 있는 내용을 배우고 싶다. 나를 보여주고 표현하고 싶다.

2. 신념: 지난번에도 그랬으니 이번에도 똑같을 것이다. 학교 성교육은 수준이 낮다. 친구들은 나보다 잘 모른다.


그래서 난 두 가지를 얘기했다.


첫째,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을 다녔었니? 그럼 넌 4년 아니라 더 많은 시간 성교육을 받았단다.

이 질문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모두 사실이 아니라 나의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작은 틈을 만든다.


둘째, 오늘 나를 예전에도 만났었니? 사람은 모두 다른 생각과 감정을 갖고 있지. 세상에 나랑 똑같은 사람은 없어. 그렇다면 오늘 수업이 작년과 같을 수가 없겠지? 들어보고 얘기해야겠네~ 오늘 난 책에 없는 이야기를 가져왔어.

내 생각이 틀렸네?라는 작은 틈에 오늘 수업이 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끼워 넣는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의 내용이 아니라 비언어다. 내 마음 안에 비난의 생각이 있으면 위의 대사는 모두 비난으로 바뀌어서 전달된다.


그리고 전체 아이들에게 얘기했다. '오늘 승희(가명) 덕에 책에서도 볼 수 없는 성 이야기를 듣게 됐어요~ 기대하세요! '


아이들은 눈을 반짝이며 책상 앞으로 더 바짝 다가와 앉았다. 그리고 승희도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자신의 질문 덕에 새로운 이야기를 친구들이 듣게 됐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그리고 40분 내내 손을 번쩍 들며 신나게 참여했다. 음모 미용실이 없는 이유, 머리카락을 이식하면 음모는 자라다 멈출까? 이런 내용은 성교육 책에서 찾아보기 힘든 이야기고 나는 약속을 지켰다.




쪼그만 게 어른한테 덤벼? 너 인성교육이 안됐구나.
야! 너는 수업 듣지 마.




라는 비난과 협박의 말들이 쏟아졌다면 그날 아이들은 성에 대한 지식 대신 성과 관련된 불편한 감정을 기억하게 됐을 것이다.' 4학년 때 성교육 시간에 무슨 내용을 배웠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그날 오셨던 선생님이 질문을 받고 막 화내셨어. ' 난 아이들이 성교육 시간을 그렇게 기억하길 바라지 않는다.

성교육 시간은 즐겁고 호기심 넘치고 나의 경험을 쏟아내는 시간이어야 한다. 내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해 이해하고 불안감을 떨치는 시간, 나의 주변에서 있었던 불편한 상황에 대해 알고 확신 있게 행동할 수 있도록 힘을 주는 시간이기를 바란다. 그래서 난 비난이 아닌 승희와의 협력을 선택했다.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에 나에게 다가온 승희가 말했다.


'제가 와이 책에서 성교육을 좀 많이 읽었어요. 나중에는 엄마가 책을 숨겨 놓을 정도였어요.

저는 중학생 오빠가 있는데요 오빠 핸드폰을 갖고 놀다가 그 안에서 이상한 사진들을 봤어요.'


수업시간 종이 치고 긴 대화를 나누지 못해서 안타까웠다. 아이가 지금까지 했던 얘기들이 스쳐 지나가면서 하나씩 퍼즐이 맞춰진다.


'많이 놀랐구나. 이해되지 않는 것들을 알기 위해 혼자 책 보고 공부했구나. 친구들에겐 말도 못 하고 답답했겠네. 말을 해도 되는 사람인지 나를 시험해봤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셀 수도 없이 많은 질문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이 이야기를 다른 어른과 나눈 적이 있었을까? 담임 선생님이나 부모님, 아니면 날 보호해 주는 어른 누구에게든 얘기했다면 어떤 내용의 이야기를 들었을까?


학년이 올라가면서 아이들은 어른들에 대한 경험도 쌓아간다. 내가 질문했을 때 반응, 믿고 솔직하게 말했을 때 돌아오는 대가, 지시를 거절했을 때 받는 비난. 성에 대해 놀란 마음을 털어놓고 얘기하기에 주변 어른들은 안전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수도 있다.


초등 1학년 성폭력 예방 교육에서 성폭력 사건이 일어났을 때 가장 두려운 사람은 가해자가 아니라 그 얘기를 듣고 화낼 엄마라고 말하는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집을 나와 방황하는 미성년자 아이들을 꼬셔서 성폭행한 가해자들도 '너희 부모님께 연락하겠다'는 말로 협박을 한다니 어이가 없다.









엄마는 참 좋아, 그런데 참 무서워





엄마는 평소에는 참 좋은데, 날 사랑해 주는데... 나를 혼낼 때는 참 무섭다고.


엄마가 무서워?


응, 근데 화내는 때 아니면 좋아. 사랑해줘.


엄마가 언제 화내는데?


내가 위험한 것을 했을 때.


위험한 것이 어떤 거야.


높은 데서 뛰어내리고, 물건 던지고, 때리고.


6살 율이는 에너지도 많고 감정을 거르지 않고 표현하는 편이다. 그래서 이것을 조절하고 적당히 표현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위험한 행동, 하지 말아야 하는 행동은 여러 번 들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때로는 우리 집이 7층이란 이유로 금지되는 것들도 많다.

금지된 행동을 하고 나서 혼난 아이가 한바탕 울고 나면 꼭 안아주기, 감정 읽기, 율이가 원하는 것, 엄마가 원하는 것, 내 행동이 주변에 미치는 영향, 다음번에는 어떤 행동이 필요하며 엄마가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지를 얘기했는데 잘 전달되지 않았나 보다. 그냥 혼난다로 뭉뚱그려서 표현하다니.


나는 엄마가 두려워서 피해 사실을 숨긴다는 1학년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결심한 것이 있다. 훈육 후에는 반드시 아이와 내가 한편이라는 것을 기억하게 한다는 것이다.


한참 울고 난 후 아이의 울음이 잦아들 때, 조용히 묻는다.


위로가 필요해?


아픔을 준 사람과 위로하는 사람이 같다는 것이 참 혼란스럽지만 어쩌겠나. 엄마는 하난데.


응, 위로해줘.


이때부터 우리가 한편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중요한 시간이다. 마음을 나누는 긴 대화가 끝나고 우리가 마지막으로 하는 멘트가 있다.






우리는 한 팀. 하이파이브!






그리고 손바닥을 하늘 높이 올려서 친다. 가장 어렵고 두려운 순간에 아이가 내 편이 있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서 여러 번 친다. 어떤 행동에 대해 혼날 수 있지만 언제나 마지막엔 내편이 되어줬던 엄마(아빠, 이모, 삼촌, 고모, 할아버지, 할머니 등등)를 기억하게 하자. 세상에 나를 믿어주는, 내가 믿을 수 있는 한 사람만 있어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당신의 한 팀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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