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반 친구들을 진짜 친구라고 하지 못하는 이유
우리 박시(별칭)에게는 12년 된 친구들이 있다. 지금도 만남을 이어가는 어린이집을 다닐 때 만난 친구들이다.
박시는 9개월이 되기 전부터 어린이집을 다녔다. 엄마가 일하느라 함께 하지 못했던 그 긴 시간들을 잘 보낼 수 있었던 것은 부모를 기다리며 함께 놀았던 친구들이 있어서라고 확신한다.
7년 가까운 시간 동안 함께 밥 먹고 놀고 또 놀았던 친구들에게 참 감사하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한다. 학교에 입학한 박시가 학교 친구들은 진짜 친구는 아니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어린이집 친구들이 진짜 친구고 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은 그냥 친구라고 말한다. 학교 친구들이 이 말을 들으면 얼마나 서운할까.
박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는 된다. 나 역시 같은 학교, 같은 교실에서 함께 공부했다고 친구라고 하지는 않았으니까. 대화나 교류 없이 같은 교실에서 1년간 생활만 함께한 사이도 있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일곱 살 아이도 친구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있다. 친구를 만드는 것은 수업시간이 아니라 학교가 끝난 후의 자유로운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 안에서 심심함에 몸부림칠 때 문밖에서 들려오는 ‘00야 놀자~’라는 한마디가 친구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즐겁고 안전한 관계 안에서 충분한 정서적 교류를 바탕으로 신뢰를 쌓은 관계를 바로 친구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요즘 학교에는 이런 ‘진짜 친구’가 몇 명이나 있을까?
박시가 좀 감성적이고 관계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는 아이일 수도 있겠다. 학교를 다녀와서 낮잠을 두 시간씩 자고 일어나는 아이를 보며 학원도 안 다니는데 뭐가 그렇게 힘드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박시는 세상 물정 모르는 엄마에게 한 수 알려줘야겠다고 마음먹은 듯 이렇게 말했다.
" 엄마, 학교는 참 힘든 곳이야...
교실에는 세 개의 그룹이 있어. 하나는 인싸(영향력 있는 아이들), 하나는 중간 사람(그냥 평범한), 하나는 아싸. 그런데 인싸 그룹에 있으려면 얼마나 힘든 줄 알아? 싫은 것도 해야 하고 걔들이 괴롭혀도 즐거운 척해야 해. 잘못하면 아싸가 되는데, 아싸가 되면 숨 만 쉬어도 미움을 받아."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고 화가 났다. 어른들 사이의 권력관계와 힘의 불균형이 아이들 안에서도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어떤 그룹 안에 속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는 아이가 보였다. 배우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남는 것이 힘들었던 것이다. 친구라고 말하지만 눈치를 봐야 하고 자기가 원하는 이야기를 할 수 없으며 거절도 용납되지 않는 힘의 세계였다. 약자의 자리에 서있는 친구를 돕거나 곁에서 힘이 되어 주는 것은 배신이라는 낙인과 폭력의 희생자가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런 관계를 어떻게 친구 사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언젠가 아이의 학교 친구들과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친한 친구들이라며 꼭 함께 가고 싶다고 해서 길을 나섰는데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발견한 것이 있다. 12년 지기 친구들 사이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었는데, 그건 바로 '경계'였다.
누구나 신체적, 심리적 경계를 가지고 있다. 이 경계는 나를 보호하고 다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꼭 확인해야 하는 것들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아서 잘 침범하기도 하고 때론 손상되기도 한다.
놀이를 하면서 아이들은 사람마다 다른 경계가 있고 이것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기도 한다. 왜냐하면 친구와의 경계가 반복적으로 깨지면 내가 외로워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아이들이 원하는 것도 들어보고 합의점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대부분 그 조율은 성공한다. 왜냐하면 오늘 내가 원하는 놀이를 하지 못했어도 내일이 있고 모레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싸움을 하더라도 내일이면 같은 장소에 나와 있는 친구를 발견하기 때문에 다시 화해하고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럴 때쯤엔 이미 알게 된다. 친구가 정말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싸웠지만 관계는 다시 회복될 수 있다는 것과 다툰 후에 마음 불편함과 화해했을 때의 안도감과 기쁨, 그리고 다시 놀이를 함께 할 때의 하나 된 느낌을 말이다.
내가 박시와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 발견한 것은 경계를 위태롭게 넘나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저래도 되나. 저러면 화낼 것 같은데... 그만하지...' 하는 순간에도 장난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친구가 불쾌해하는지를 확인하지도 않는다. 그 장난과 놀림을 하고 있는 아이들 중에는 박시도 있었다.
이제 그만하라는 말에 아이들은,
'우리 놀고 있는 건데요? 쟤 싫어하지 않아요. 웃고 있잖아요.'
그리고 돌아본 그 친구는 정말 웃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이 잠깐 자리를 비웠을 때, 조용히 괜찮은지를 물어봤다.
'아니요. 안 괜찮아요. 하지만 괜찮은 척해야 해요...'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조용히 말하는 그 아이 입에서 작은 어른이 보였다. 그리고 바로 멀리서 오는 친구들을 발견한 후 아까 그 '웃음의 가면'을 쓴다.
박시도 가끔 친구들이 놀려서 괴로웠다는 말을 할 때가 있다. 엄마들은 이런 얘기를 들으면 속상하기도 하고 때론 분노하기도 한다. 나 역시 그런 적이 많았다. 그런데 그날 내가 확인한 것은 아이들 놀이 문화였고 우리 아이가 친구들의 놀림에 괴로워할 때 엄마로서 당연히 느끼게 되는 속상함이나 분노와는 달랐다.(놀리는 것을 놀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들은 놀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니 그렇게 부르려고 한다. 놀림을 통해 누군가를 아프게 하는 것은 놀이의 탈을 쓴 폭력이다.)
아이들이 하고 있는 것은 가해자도 피해자도 없는 그냥 돌고 도는 놀림 놀이였다. 오늘 내가 놀리면 다음날은 내가 놀림의 대상이 되고 이것은 경계라는 선이 없기에 결국 마음의 상처를 받을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
그러면 12년 지기 친구들과는 어떨까?
매일 보던 친구들을 초등학교 입학한 후에는 자주 보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은 오랜만에 만나도 과거로 돌아간 것처럼 신나게 놀고 떠든다. 함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그들의 대화를 들어봤는데 학교 친구들과 하는 대화의 흐름이 다르다.
키가 큰 친구와 작은 친구가 있었는데 키가 작아서 공연이 잘 보이지 않았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키 큰 친구: '내가 목마 태워줄까? 했는데... 싫댔어요.'
키 작은 친구 : '네가 내 아빠냐?'
다른 친구들 : 난 할머니, 난 할아버지, 난 엄마....
키 큰 친구: 큭, 아빠가 낫겠다!
모두: 까르르.. (웃음)
이 대화에서는 '난쟁이 똥자루, 쪼그만 게, 키만 큰 게' 이런 단어들은 오고 가지 않는다. 잠깐 기분이 나쁠 뻔했는데 다른 친구들이 재미있게 이야기를 넘겨준다. 그래서 웃으며 즐거운 대화를 이어간다. 목마를 태워서라도 좋은 걸 보여주고 싶은 마음을 믿어서 일 수도 있고 키가 그들 사이에서는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난 이 대화가 참 좋았다. 그리고 키가 큰 친구가 아이들에게 한 약속도 참 멋졌다.
친구들 : 넌 키가 크니까 중학교 가도 일진이 널 건들지 못할 거야! 맞아, 맞아
키 큰 친구 : 나랑 같은 중학교 가는 애들은 내가 지켜줄게, 우리 학교 와!
맞다. 힘은 나와 친구,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 있는 것이다. 약한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고 이익을 독점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친구로부터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들은 세 명의 아이들은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웃는다. 난 그 웃음을 잊지 못할 것 같다.
목적 없는 놀이와 함께 한 시간들이 만들어준 아이들 사이의 경계는 참 단단하고 건강했다. 그리고 그 선을 넘었다가도 바로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온다. 불편함을 편하게 말하고 이것을 인정받고 서로의 정서 회복을 위해 관점을 다른 곳으로 돌려주려 노력하는 모습을 과연 학교 폭력 예방 교육으로 만들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