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친구도 없는데 뭐가 그리 신나는지 놀이터를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고 나는 오후에 있었던 짜증 나는 일 때문에 심장이 뛰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좀 시간이 지나자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것처럼 기운이 없었다.
엄마, 나랑 놀자!
율아 엄마가 지금 많이 속상해서 놀고 싶지가 않아.
왜? 무슨 일이 있었어?
어! 믿었던 사람이 엄마랑 약속을 안 지켜서...
선생님한테 얘기해 도와달라고.
응 엄마도 그러고 싶은데 엄마는 선생님이 없어.
응 그래?? 그럼 이리 와 봐. 내가 기분 좋게 해 줄게.
움직이기 싫어 지금 우울해.
아냐, 한 번만 해봐
뭔데...
이리 와서 미끄럼을 타는 거야. 그럼 기분이 좋아져!
아냐 안 좋아질 거야...
아냐 난 좋아지더라. 해봐.
이 미끄럼은 우리 동네에서 제일 무서운 미끄럼틀이다. 내가 무게가 있어서 그런지 착지를 할 때면 몸이 붕 날아오르기 때문에 항상 긴장이 된다. 율이가 잡아 끄는 바람에 억지로 꼭대기에 올라가서 흐느적거리며 몸을 실었다. 그리고 몸에 힘을 주고 균형을 잡으며 땅에 착지하는 순간! 신기하게 몸에 힘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속상한 마음이 몸 밖으로 조금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율아! 정말 효과가 있어!
거봐! 내 말이 맞았지?
그렇게 5번을 타고나니 마음이 상쾌해진다.
그래, 무슨 사정이 있겠지.
'내일 연락을 준다고 했으니까 그때까진 그만 생각하자.' 그리고 미끄럼틀을 타고나서 알았다. 내 감정은 짜증이 아니었다. 걱정과 두려움과 함께 온 슬픔이었다.
몸은 감정과 연결되어 있다. 오금이 저린다. 뚜껑이 열린다. 오글 거린다. 등골이 오싹하다 등의 옛 말들을 생각해보면 감정이 몸으로 어떻게 표현되는지 알 수 있다.
슬플 때는 다리에 힘이 풀린다. 슬픔은 상실에 대한 감정으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잃었을 때 느껴지는 감정이다. 이제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슬펐다.
예전에 동시통역으로 진행하는 코칭 수업을 수강할 때 일이다.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대화를 나눌 때면 쉴 새 없이 우는 참여자가 있었다. 그때마다 선생님은 창문을 가르치며 'Look at the sky. 하늘을 봐.'라고 얘기하셨는데 그러면 참여자는 잠깐 울음을 그치고 대화를 나누다가 다시 할머니 얘기가 나오면 또 울었다. 그렇게 몇 번이 반복되고 난 궁금한 점이 생겼다.
'그냥 과거의 고통이나 상처를 싹 치료하고 대화하면 다시는 울지 않을 텐데 자꾸 잊게 하려고 하니까 울잖아. 치료해주면 좋겠다. '
그리고 과거에 대해 묻지 않고 하늘을 보게 하는 이유를 물었더니 '몰라! 나 그렇게 배웠어!'라고 말씀하셨다.
난 충격을 받았다. 죄책감이나 수치심 없이 자신이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와 당당함이 정말 부러웠다. '그래 심리 상담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또 모든 스킬에 이유를 그의 스승이 설명해 줬을 리도 없잖아. 그 이유를 궁금해하지 않았다면 질문해서 알 수 있지도 않았을 테고... '
그렇게 한동안 그 궁금증을 안고 살았는데 오늘에서야 조금 알 것 같다.
두 다리를 지금 여기에 단단하게 박아 놓지 않으면 과거의 고통이나 지금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는 생각 속에서 길을 잃을 것이다. 바꿀 수 없는 과거와 연결되어 의미를 재해석하는 것도 지금의 나이고 실제가 아닌 생각들 때문에 현재에서 멀어지는 나의 손을 잡아 끄는 것도 다름 아닌 나이다. 내가 손을 놔버리면 난 길을 잃는다. 그래서 내손을 꼭 잡고 있을 힘이 필요한 것이다. 하늘을 보라고 한 것은 과거로 돌아가서 울고 있는 참여자에게 현재의 나와 손을 잡으라고 얘기한 것이었나 보다. 지금 넌 여기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깃발이었다.
힘은 상대의 슬픔을 돌보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나의 슬픔과 함께 앉아서 대화를 나누려면 나도 힘이 필요하다. 긍정 정서의 회복은 내 마음의 주인이 나라는 것과 마음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을 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나게 해 준다. 슬픔을 마주할 용기가 생기지 않거나 슬픔을 돌볼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면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고, 생크림 케이크를 먹고, 마음이 달달해지는 향초를 켜고, 따뜻한 목욕물에 몸을 담근 후 마음을 풀어주는 음악을 들으며 힘을 모아 보자. 반복되는 생각에서 멀어져야 막장 드라마 같은 시나리오를 쓰며 슬픔의 구덩이로 빠지지 않을 테니까. 회복탄력성이라는 어려운 단어를 기억할 필요도 없다. 그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