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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희 Jan 16. 2021

울면 좀 낫냐?

세상을 다 잃은 기분이란

블로그를 뒤져 평이 좋은 카페를 찾았다.


5살 아이와 동생, 이렇게 셋이서 방문한 카페에는 스탬프를 찍어서 만드는 엽서가 있었고 그것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빨리 집에 가자고, 너무 답답하다고 졸라댈 아이 생각에 카페 입구부터 진이 빠지고 있었는데 그 스탬프를 발견하는 순간, 30분의 자유를 선물 받았다.


소중하게 하나하나 고르고, 찍고, 감상하고를 반복하는 아이를 보며 행복이라는 것이 별것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해외여행을 가거나 비싼 음식을 먹지 않아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고 있을 때 행복은 찾아온다는 것을 아이가 기억했으면 좋겠다.



도장 찍기 하니까 행복해?




'응! 이건 특별한 거야!' 카페에 잠깐 머무르는 동안 아이는 아이는 정성껏 만든 엽서를 손에 들고 행복한 표정 짓고 있었고 세상에 하나뿐인 엽서라며 뿌듯해했다. 그리고 집에 가는 길에는 차창을 조금 열어 엽서를 밖에 내보낸 후 펄럭이는 소리를 들으며 즐거워했다.




그러다가 날아가, 문 닫아~





라고 말하는 순간, 아이의 비명소리.





안돼! 이게 얼마나 소중한 건데!
Photo by Zahra Amiri on Unsplash


운다. 계속 운다. '소중한 건데. 이게 얼마나 소중한 건데'를 되뇌며 울고 있는 딸을 보며 


'거봐! 엄마가 날아간다고 했지? 너 그럴 줄 알았어, 그러게 엄마 말 좀 들어! 넌 항상 내 말 안 듣더라. 그렇게 엄마 말 안 들으니까 벌 받은 거야. 쌤통이다! 뭘 잘했다고 계속 울어? 시끄러워! 한 번만 더 우는 소리 들려봐 여기다 버리고 갈 거야!!' 


라고 말하지 않았다. 


지금 나의 말이 아이의 평생을 따라다니며 내면의 목소리가 되어 반복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엄마가 곁에 없는 순간이 왔을 때, 곁에서 함께 슬퍼할 사람이 없을 때에도 늘 곁에 있어주는 한 사람은 바로 나다.


나를 최고의 위로자, 공감자로 훈련시키면 혼자 있는 순간에도, 비난과 판단으로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 곁에 있을 때에도 버틸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모든 감정은 옳다. 그래서 함께 슬퍼했다.


' 그래 맞아 소중한 건데. 정성껏 찍었는데. 흔들리지 않고 선명하게 찍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그걸 해냈는데. 세상에 하나뿐인 엽서였는데. 그래 맞아. 그래... 이제 만날 수 없게 됐다.'


이 얘기를 듣고 더 울었다. 나의 생각과 마음을 누군가 알아주고 나의 정리되지 않은 슬픔을 소중하게 읽어주는 이가 곁에 있을 때 맘껏 슬퍼할 수 있다. 


'하지 마! 애가 더 울잖아! 왜 더 울려?'


라고 얘기하는 동생이 아니어서 참 다행이다. 양육 철학이 다르고 감정에 대한 신념이 달랐다면 나는 그곳에서 비난과 싸우느라 아이의 슬픔과 온전히 함께 하지 못했을 것이다.


슬픔을 이해하는 이모가 곁에 있고 슬픔과 함께해주는 엄마를 갖고 있는 아이는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연습하고 있다. 










처음부터 내가 슬픔이라는 감정에 관대했던 것이 아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슬픔의 감정을 많이 억압하면서 살아왔다. 눈물을 보이는 것은 약함의 증거이고 불쌍해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항상 유쾌함과 발랄함으로 포장하며 어린 시절을 보내왔다.


그래서 지금도 슬퍼하는 이들과 함께 할 때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어떤 자세로 있어야 할지... 이 모든 것이 어렵다. 


'저절로 나오는 것이지 뭘 생각하면서 말하고 표정 짓고 자세를 취해? '


그러니까 어렵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에게 슬픔은 자연스럽지 않다.


감정에 대해 공부를 시작하고 나의 감정에 대해 들여다보는 연습을 하면서 조금씩 나아지고 있지만 아직도 갈길이 멀다. 그런데 아이들은 배우지 않아도 감정에 대해 많이 아는 것 같다. 본능에 솔직해서 그런지, 아직 사회에 길들여지지 않아서 그런지, 언어 발달이 어른보다 덜 되어서 그런지 몰라도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표현한다. 



둘째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다.


8살 된 아이가 레고를 하며 놀다가 소리를 지른다. '아!!! 아!! 악악악!!! 난 몰라! 어떻게 해!!'

6시간 넘게 맞추던 레고가 부서졌다고 하며 방에 들어가서 울고 불고 난리가 났다. 처음에는 나도 속상할 것 같다고 함께 안타까워했다. 그런데 그 울음의 시간이 길어지자 나도 모르게 


'이렇게 울 시간에 다시 맞추겠다. 운다고 레고가 다시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시간은 가잖아. 너만 손해지. 울면 좀 낫냐?'


라고 말했다. 그러자 아이가



'응. 한참 울고 나면 다시 힘이 생겨.'



그러고 나서 십여분을 더 펑펑 울던 아이는 다시 레고 앞에 앉았다.


나중에 알았다. 슬픔이라는 감정의 역할이 무엇인지. 


인사이드 아웃이라는 애니메이션에서 슬픔이의 역할이 잘 나타난 장면이 있다. 소중한 로켓을 잃고 울고 있는 빙봉에게 기쁨이가 다가가서 주위를 돌리려고 애쓴다. 목표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슬픔의 감정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빨리 슬픔에서 벗어나 달려야 하는 상황에서 슬픔은 상황을 더 안 좋게 만드는 장애물 같은 존재로 취급받기도 한다.  하지만 빙봉을 다시 일어서서 움직이게 한 것은 기쁨이가 아니었다. 슬픔이 함께 하며 로켓과의 추억을 이야기하고 슬퍼했을 때 빙봉은 일어설 수 있었다. 


슬픔은 내게 중요한 것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려주고 상처 받은 나를 돌보며 다시 현실로 돌아가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슬픔을 부끄러워하고 감추며 살았던 나는 몰랐다. 그래서 이제야 아이들에게 슬픔을 배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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