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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연 Jul 01. 2024

수복 이후 서울, 평양에서 다시 부산으로

영화사가 노만 11

"9.28 수복 이후 서울의 분위기는 바뀌어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와 여동생들을 재회하니 그 감회는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서울 집에 돌아왔다고 해도 학교에 갈 수도 없었고 친구들도 뿔뿔이 흩어져 만날 수 없었다. 거리 곳곳에는 폭격으로 파괴된 도시의 잔해들이 가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촌형님 만황의 소개로 다시 미8군 부대에 들어갔다. 서울 수복 이후 전황은 국군의 계속된 북진으로 이어졌다. 이번에도 나이를 열여덟 살로 올려 부대 노무자로 합류했다. 이전에 관두었던 앰뷸런스 부대와는 다른, 순전히 백인 장교와 사병들로만 구성된 부대였다.

부대에서의 생활을 이미 해보았던 터라 미군들과 소통하는 것에 별로 어려움은 없었다. 영어를 썩 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학교에서 배운 단어 몇 마디, 문장 몇 개를 이어가면서 의사소통을 했다. 월급도 꾸준히 나왔고 고되지만 먹고 지내는 것도 그런대로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생활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백인 사병들은 한국인 노무자들을 대놓고 괄시했다. 흑인 앰뷸런스 부대에서는 겪어보지 못했던 '인종차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부대 내에서 벌어지는 도난 사고의 중심에 한국인 노무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C레이션 박스나 식사로 나오는 햄버거나 프라이드 치킨, 심지어는 부대원들에게 지급되는 수건, 숟가락, 치약같은 생필품 같은 것들을 볼 때면 당연히 남다른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우리 한국 사람들은 정말 못살 때이지 않았었나. 부대 물품을 몰래 훔쳐가거나 빼돌려다 파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때문에 미군들은 우리 한국인 노무자들의 몸 수색을 불시에 하기도 했다. 미군 부대를 비롯해 피난 시절 여기 저기에서 겪었던 경험들은, 이후 내 문학적 감수성의 밑바탕이 되었다. 뭔가 저들은 잘 살고, 우리는 못 살고... 그런데서 오는 열등감이나 서글픔 같은 것을 많이 보았다. 고등학교 2학년 교지 《경희》 4집에 실린 단편소설 <소년차장>, 3학년 때 《경희》 5집에 쓴 단편소설 <수건>이 모두 이 때 경험한 이야기들을 소재 삼은 것들이었다.

1950년 10월 25일, 우리 부대는 평양에 도착해 김일성이 집무하던 수상청을 점령했다. 수상청에서 북한에서 출간된 잡지나 책들을 비롯해 노어(러시아어), 일본어, 영어로 된 수많은 책들을 본 기억이 난다. 그 책들이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곳에서 주운 영어 책을 한동안 가지고 다니며 들여다보기도 했다. 또 수상청 어딘가에는 북한 화폐들이 잔뜩 쌓여있는 것도 보았다. 하지만 미군들은 그 돈을 휴짓조각으로 내다 버리기도 했다. 하루는 평양 친할머니댁을 겨우 물어 찾아갔다. 국민학생 때 서울로 내려온 이후로 실로 몇 년 만에 할머니의 얼굴을 보았다. 할머니를 부둥켜 안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러나 그 이후로 할머니를 다시는 뵐 수 없었다. 같은해 11월, 중공군의 남하로 우리 부대는 평양에서 철수했다. 다시 남쪽으로 내려왔다. 서울에 도착한 것이 12월 2~3일 경이었다.

이듬해인 1951년 1.4 후퇴로 전황은 크게 뒤바뀌었다. 아버지를 비롯해 우리 식구들은 다시 부산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어머니와 여동생들이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부산 영주동에 아버지가 새로 마련한 바라크집에서 머물렀다. 비에 젖지 않는 C레이션 박스로 지은 집이었다.

이 무렵 부산에서 친구 채조병과 재회했다. 전쟁이 나고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그의 소개로 부산항에 부두노동을 함께 나갔다. 항구에 도착한 화물선 선박에서 커다란 유리상자를 내려 옮기는 일이었다. 그러나 유리를 나르는 일이 너무 무겁고 힘이 들어 딱 하루만 일하고 곧장 그만 두었다.

다시 돌아온 부산에서 기억에 남는 또 다른 일은 국제시장에서 책 장사와 만화 장사를 한 것이었다. 미군부대 어딘가에서 나오는 영어로 된 만화책들과 소설책들을 모았다. 특히 만화책은 종이 질도 좋았고 국산 만화책들과 달리 화려한 컬러로 인쇄된 것들이었다. 영어로 쓰인 말풍선 위에 종이를 덧대고 '날림 번역'을 한 단어와 문장을 써붙였다. 엉터리였지만 나름 창작이라면 창작이었던 셈이다(웃음). 그 책들을 좌판에 늘어놓고 싼 값에 빌려주었다. 누군가 하자 한 것도 아니었고, 순전히 내 아이디어로 한 일이었다. 책을 돌려받지 못하는 일도 자주 있었지만 한동안 이 일로 꽤 벌이를 했다."

노만(오른쪽)과 친구 채조병(왼쪽). 1952~1953년 경. ⓒ 노만, 한상언영화연구소.

노만의 서울중, 고등학교 시절 친구 채조병은 2004년 서울고등학교 제6회 동창회에서 펴낸 『졸업 50주년 기념문집: 졸업 50·인생 70』(서울중고등학교 제6회 동창회, 2004)에 쓴 「마지막 학기 병실에서 만난 친구 이야기」라는 제목의 수기에서 자신의 학창시절과 노만과의 추억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3년간의 피난살이를 마감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휴전이 성립된 지 두 달만이었다. 부산을 비롯해서 전국 곳곳으로 흩어졌던 학우들이 한데 모였다. 10월 1일 명실상부한 전교적인 새로운 개교가 이루어졌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중, 고생활의 마지막 한 학기를 피난지 아닌 본교에서 마감할 수 있었다. ...(중략)...

이런 가운데 그리운 친구들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게 된 것이 무엇보다도 기쁜 일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이다. 헤어진지 짧게는 1년, 길게는 3년이 넘는다. 말할 수 없이 반가웠다. 특별히 두 친구가 그러했다.

노만길과는 부산 피난지에서 만났다. 부두 노동을 함께 한 일도 있고, 복교 후에는 김진규 등과 더불어 문예반 활동을 같이 하면서 늘 어울려다녔다. 그러다가 서울에 분교가 설치되자 그는 한 해 먼저 상경했다. 신문, 문예지 등을 만들면서 '문예부흥'을 일으키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었다. 재회의 기쁨 속에 1년 간의 공백은 금세 사라졌다. 다시 단짝이 되어 문예반 일을 시작했다. 교지 발간을 위해 바쁘게 뛰어다녔다. ..."(서울중고등학교 제6회 동창회 편,『졸업 50주년 기념문집: 졸업 50·인생 70』, 서울중고등학교 제6회 동창회, 2004, 198쪽)

노만. 1953년 경. ⓒ 노만, 한상언영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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