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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연 Jul 17. 2024

잡지 《영화세계》 입사

영화사가 노만 23

"영화계에 본격적으로 입문한 것은 대학교 1학년 2학기가 시작된 1954년 9월이었다. 전쟁이 끝난 이후 아버지는 남대문에 여객회사 '남북여객(南北旅客)'을 설립하고 버스 운수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셨다. 그때 최초로 서울에서 대전까지 가는 직통 시외버스 노선을 개발해서 운영할 정도였다. 회사 재정은 어머님이 대부분 관리하셨다. 어머님이 가끔 버스표를 주면 몇 장 더 얻기도 했다. 학교 친구들에게 버스표를 한 움큼씩 가져다 준 적도 많았다. 다들 그걸 바꿔다 구두도 닦고 막걸리도 많이 마셨다. 동기들에게 꽤 인심 썼다(웃음).

《영화세계》사(社)와 인연이 닿은 것은 잡지에 '남북여객' 광고가 실린 것 계기였다. 그때 잡지에는 이런 저런 광고들이 많이 붙었다. 운수회사나 병원, 다방 등, 영화계와 별 관련이 없는 업체들의 광고들도 많았다. 《영화세계》창간을 준비하던 정운선 사장과 관계자들이 광고 일로 남북여객을 방문했던 모양이다. 그 자리에서 아버지가 내 이야기를 꺼냈다. 운수회사 연합 '서울승합'에서 나오는 신문에 내가 쓴 소설 <소년차장>이 실린 것을 보고 운수업 하시는 아버지 동료가 내 이야기를 하신 것 같다. 내 큰 아들이 국문과 다니고 글을 쓰는 데 거기서 한 번 써보면 어떻겠나 하신 거다. 며칠 후, 아버지가 '너 여기 한 번 가보라' 하셨다. 돈의동에 있던 잡지사 사무실로 갔다. 남북여객에서 왔다고 하니, 면접 보는 것 처럼 내게 뭔가를 길게 물어보지도 않았다. 곧바로 일을 시작했다."

《영화세계》1954년 12월 창간호에 실린 남북여객 광고. ⓒ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종로구 돈의동에 본사 사무실이 위치해있던 잡지 《영화세계》는 1954년 9월 22일 출판 당국의 발행 인가를 얻어 창간 준비에 착수했고, 그해 11월 무렵 창간호가 발행되었다. 표지모델은 홍성기 감독의 영화 <출격명령>(1954)의 주연 여배우 염매리였다. 창간호에는 당대 영화인들 뿐만 아니라 유명 문인들의 글도 다수 수록되었다. 정운선 사장의 창간사인 <권두사>를 비롯해 작가 오영진과 김성민 감독의 대담 <구미영화계현황보고>, 평론가 유두연과 홍성기 감독의 대담 <출격명령의 평과 연출자의 변> 이외에, 이헌구의 <한국영화의 국책성과 예술성>, 정비석의 <포옹과 키스 문제 (한국영화를 중심으로)>, 백철의 <영화는 문학을 압도할 것인가>, 박인환의 영화 <챔피온> 평, 홍성기의 <연기자 전택이론> 등 화려한 필진을 선보였다. 그 밖에 배우 박경주, 김신재, 이향, 염매리, 전택이, 노경희의 '나의 연기생활 회고' 특집이 수록되었고, 안종화의 시나리오 <운명>(윤백남 원작), 김광주의 영화소설 <무정녀>도 연재 수록되었다.

영화세계 1954년 12월 창간호 표지(좌). 표지모델은 <출격명령>(1954)의 배우 염매리. 사장 정운선의 <권두사>(우) ⓒ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막상 가보니 사무실 규모얼마 되지 않다. 몇 사람이 창간호 발간 준비 한창이었다. 정운선 사장은 어쩌다 한 번 사무실에 얼굴을 비추었을 뿐, 직접 마주친 것은 몇 번 안 되었다. 어윤찬 잡지 부사장, 김갑산 편집국장, 조형순 주간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잘 기억나지 않는다. 잡지 제작 실무는 편집장이던 정경용과 인쇄 담당 성기원과 함했다. 담당 업무가 세분화되어 있거나 일 가르쳐준 '사수'가 따로 있던 것도 아니었다. 고작 서너 사람이 정해진 업무 구분 없이 일인 다역으로 여러 일을 하는 식이었다. 일이 끝나면 이들은 나를 데리고 명동이나 인사동 뒷골목으로 가서 술을 무지하게 먹였다. 잡지 하는 사람들은 술을 잘 먹어야 한다나(웃음). 정운선 사장내게 처음 막걸리와 담배를 배워줬다. 약관의 나이에 또래들보다 사회생활을 일찍 시작한 셈이었다.

잡지에 수록된 해외영화 배우 화보나 스틸, 영화 소식 기사들은 주로 영어나 일본어 영화 잡지들을 통해서였다. 《키네마준보 キネマ旬報》《에이가노도모 映画の友》 같은 일본 영화잡지들도 많이 참고했다. 영어 잡지들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표지가 없는 잡지들을 싼 값에 다량으로 입수할 수 있었다. 영화인들이나 현장 취재, 단독 기사를 쓴 것은 한참 후에였다. 아무래도 가장 힘든 건 '필자 섭외'였다. 명동에 나가 영화인들이 모여있는 다방에서 만난 이들에게 약속을 받고 원고를 받지 못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1954년 12월 창간호 필자 섭외 과정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그때만 해도 나는 들어온 말단이었으니. 창간호의 필진이나 구성을 보면 잡지는 꽤 야심차게 출발했던 것 같다.

학교에서는 내가 영화잡지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하니 동기들이 꽤 부러운 눈으로 보기도 했다. 영화배우나 감독들을 만난다니 신기했던 모양이다. 그 중에는 훗날 배우가 된 철학과의 이순재(李純才, 1934~)도 있었다. 이순재는 나보다 한 해 먼저인 서울고 5회 졸업생이었지만 같은 54학번으로 함께 대학을 다녔다. 배우를 지망하던 그는 내가 영화 잡지 일을 한다고 하니 영화계 연결을 부탁하기도 했다(웃음). 버스표를 나눠 준 적도 있었고, 그만큼 친한 사이였다. 나중에 그에게 외국 영화잡지 기사 번역을 맡긴 적도 있었다. 그때 나도 월급을 받지 못해 그에게 원고료를 주지 못했지만.

그때만 해도 영화잡지사들은 모두 비슷한 규모의 영세한 회사들이었다. 《영화세계》에서 제대로 된 급여를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다. 급여를 챙겨줄 만한 재정 여건도 아니었다. '무급 아르바이트', '무급 인턴'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학창시절 교지 제작을 직접 나서서 해본 경험도 있고, 무엇보다 영화에 푹 빠져 지냈으니 잡지 일은 꽤 흥미있고 적성에 맞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운선 사장은 잡지사 대표직을 그만 두었다. 매달 잡지를 발행하기에도 빠듯한 열악한 운영 사정을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는 잡지 경영에서 손을 떼고 발행인에서 인쇄 편집인으로 내려 앉았다. 정운선은 박인규에게 대표직과 잡지 경영권을 넘겼다. 알고보니 박인규는 내가 다니던 일신국민학교 동창이었다. 그 인연으로 《영화세계》에서 계속 일하게 됐다."

《영화세계》 기자시절 노만(가운데). 영화세계 대표 박인규(오른쪽)과 그의 형 박인수(왼쪽). 1955년 명동 거리에서. ⓒ 노만, 한상언영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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