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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연 Jul 16. 2024

'씨네팬' 이동렬과 동도극장

영화사가 노만 22

"영화에 본격적으로 빠져든 것은 서울고 동기이자 같은 대학 정치학과에 다니던 친구 이동렬(李東烈, 1935~2021)의 영향이 컸다. 배우 잉그리드 버그만(Ingrid Bergman, 1915~1982)열렬한 팬이었던 그는 말 그대로 '영화광', '씨네팬'이었다. 샤를 보아이에와 함께 출연했던 <개선문 Arch of Triumph>(1948), 레슬리 하워드와 출연한 <이별(인터메조) Intermezzo>(1939),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For Whom the Bell Tolls>(1943), 히치콕이 연출한 <망각의 여로 Spellbound>(1945) 등, 하여튼 그때 잉그리드 버그만 영화가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서 보던 친구였다. 그를 따라 잉그리드 버그만의 출연작은 모두 보았던 것 같다. 심지어 수업을 듣는 중에 나를 불러내어 함께 영화를 보러간 적도 많았다. 이동렬과 함께 영화를 보러다니며 점차 문학보다 영화에 깊이 몰두하게 됐다. 나중에 이동렬은 미국 워싱턴대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전공했고, 한국음료주식회사 부사장을 거쳐 1979년 한국 코카콜라 사, 1992년에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코카콜라 현지인 회장을 역임하다 2021년 작고했다."

노만의 친구 이동렬. 1981년 당시 한국음료 사장. (ⓒ 매일경제 1981.5.9. 9면 기사)


대학시절 노만이 영화를 보러 자주 찾았던 곳은 돈암동에 위치해있던 동도극장(東都劇場)이었다. 1948년 2월 성북구 동소문로에 개관한 동도극장은 당시 성북구의 신설과 서울의 지리적인 확장, 인구의 팽창과 맞물려 나타난 문화적 욕구에 부응하기 위한 산물이기도 했다. 동도극장은 1950년대 중반 당시 대학시절을 보냈던 유명인들의 회고를 통해 자주 등장하는 곳이기도 하다. 정치인 이회창, 소설가 박완서, 배우 이순재 등 당시 대학 시절을 보낸 여러 인물들의 회고에서 확인된다. 이처럼 동도극장은 전쟁 이후 당시 서울 시내 대학생들의 명실상부한 문화 공간으로 자리했다. 삼선교와 돈암교 사이에 위치했던 동도극장은 노만이 다니던 동숭동 서울대 문리대 캠퍼스에서도 걸어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있었다. 노만은 대학 시절 동도극장에서의 영화 관람 경험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1954년 영화 <햄릿> 상영 당시 동도극장 전경. ⓒ 페이스북 '삼선 공간' 페이지


"동도극장은 동숭동에서 전차나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서 갈 수 있었다. '제2봉절장(第二封切場)', 그러니까 '2번관'이었으니 입장료도 많이 저렴해서 우리 같은 대학생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곳이었다. 대학 신입생이던 1954년과 영화세계에 입사하고 난 1955년 사이 동도극장에 걸린 프로는 거의 다 보았다. 대부분이 단성사나 수도극장같은 '1번관'에서 상영하고 난 영화들이었다. 그 중에서 캐롤 리드의 <심야의 탈주 Odd Man Out>(1948)와 <제 3의 사나이 The Third Man>(1949) 여러 번 볼 정도로 빠져든 작품이었다. 특히 <심야의 탈주>의 제임스 메이슨(James Maison)의 연기나 <제 3의 사나이>의 낙엽이 떨어진 거리 위를 걸어가는 뒷 모습으로 마무리되는 라스트씬은 강렬한 인상을 남다. 그 밖에, <지상 최대의 쇼 The Greatest Show on Earth>(1952, 세실 B.드밀 감독), 히말라야를 배경으로 데보라 카가 수녀로 분한 <흑수선 The Black Narcissus>(1947), 엘리자베스 테일러 주연의 <내가 마지막으로 본 파리 The Last Time I Saw Paris>(1954), 난생 처음 안경을 쓰고 본 '입체영화'였던 <타이론데로가의 요새 Fort Ticonderoga>(1953) 같은 영화들도 매력적이었다.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감독인 비토리오 데 시카(Vittorio De Sica, 1901~1974)가 만든, 제니퍼 존스와 몽고메리 클리프트 주연의 <종착역 Stazione Termini>(1953)도 우수한 작품이었다. 가끔 배우 전옥(全玉, 1911~1969)이 이끌었던 백조가극단이나 몇몇 악극단의 공연을 본 적도 있었지만, 동도극장의 상영 프로그램 대다수는 외화들이었다. 나흘마다 한 번씩 바뀐 프로를 거의 놓치지 않고 보았으니 일주일에 최소 두 번은 극장을 찾았던 셈이다.

동도극장은 흔히 '2번관', '3번관' 하면 떠올리는 극장의 이미지들과는 확연히 다른 곳이었다. 지저분한 곳도 전혀 아니었다. 당시 신문광고에도 자주 등장한 문구였지만 '난방완비 자가발전', 그때만 해도 전기 사정이 나빠서 영화 상영 도중 영사기가 나가는 경우가 잦았는데 우리 극장은 그렇지 않다는 거지. 여하튼 동도극장에서 만났던 영화들은 당시로선 최신 문화 세례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난 후로는 더이상 동도극장을 찾지 않게 되었다. 영화 잡지 일을 하면서 단성사나 수도극장 같은 '1번관'에 더 자주 갈 수 있었고 포스터권이나 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접할 기회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1954년 동도극장에서 상영된 외화들의 신문 광고. 왼쪽부터 <심야의 탈주>, <제3의 사나이>, <종착역>. ⓒ 네이버 블로그 '세상키의 극장개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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