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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연 Jul 15. 2024

문학사(文學史)와 몽고어 수업

영화사가 노만 21

서울대 국문과 2학년 재햑 시절의 노만. 1955년 3월 1일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서. ⓒ 노만, 한상언영화연구소


"고교 졸업식 날, 단짝이던 친구 채조병과 명동에서 단 둘이 밤새도록 맥주를 실컷 마신 일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그때 처음으로 맥주를 마셔봤다. 그때 비로소 성인이 되었다는 해방감을 느껴보았다. 채조병은 학창시절 나보다 공부도 잘했고 글도 정말 잘 쓴 친구였다. 중학교 1학년 때 부터 교지에 쓴 시가 실릴 정도였으니 문재(文才)가 뛰어났다. 나와 함께 만든 교지 <경희> 5집에 실린 소설 <천재가 되려고>도 훌륭한 작품이었다. 나는 국문과에, 채조병은 철학과에 합격했다. 나는 채조병에게 문학 창작을 계속 해볼 것을 권했다. 하지만 이후 그는 해군에서 중령으로 전역한 후 서울교대 교수로 재직하다가 퇴임했고, 2023년 작고했다. 대학 동기들 중 서울고 출신들이 정말 많았지만, 특히 채조병과는 대학 시절과 그 이후에도 줄곧 친하게 지냈다.

그해 3월, 낙산(駱山) 밑에 자리한 동숭동 캠퍼스에 있는 서울대 문리대입학했다. 당시 서울대는 동숭동에는 문리대, 법대, 미대가 있었고, 공릉동에는 공대, 종암동에는 상대, 연건동에는 의대, 약대, 을지로에는 사범대, 수원에는 농대가 각각 분산되어 있었다. 오늘날 같이 관악구에 종합캠퍼스로 모여있기 이전이었다.

문리대에 입학해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내가 원하는 수업을 신청해서 내 나름의 시간표를 짤 수 있었던 점이다. 나는 국문학 중에서도 언어학이나 어문학 계열 수업은 거의 듣지 않았다. 당시 학과장이던 이숭녕(李崇寧, 1908~1994) 선생의 수업을 하나도 듣지 않았는데 이에 대해 학과나 교수들도 별달리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내  문학론과 문학사 과목들었다. 1학년 1학기에 들었던 '평민문학사'는 17~18세기 조선 후기 서민문학과 한글소설의 변천 과정과 역사를 다루었던 수업이었다. 백철(白鐵, 1908~1985) 교수의 '한국문학사'도 A학점을 받았을 정도로 열심히 수강했다. 이 외에, 유치진(柳致眞, 1905~1974) 선생의 '희곡론', 양주동(梁柱東, 1903~1977) 선생의 '고전시가론' 같은 문학론 수업도 기억에 남는다. 이희승(李熙昇, 1896~1989) 선생이 담당하던 언어학 계통의 수업도 들었다. 하지만 매번 출석을 부르던 그 수업에서는 '출석 미달'로 F를 받아 미끄러졌다(웃음). 기억에 남는 또 다른 수업 중 하나는 몽고어다. 그 과목이 어떤 연유로 국문과에 개설되어 듣게 는지 도무지 모르겠지만(웃음). 반면에 1학년 때 듣고 싶었던 고전소설 <춘향전> 강독 수업 수강은 성사되지 못했다. 수강신청을 하자 담당 행정 직원이 1학년은 이 수업을 못들으니 나중에 4학년때 들으라는 것 아닌가. 이해할 수 없었다. 아쉽게도 그 이후 졸업할 때 까지 <춘향전> 수업은 듣지 못했다. 어쨌든 문학사와 소설론, 희곡론 등 문학론 수업들로 채워진 시간표는 4학년때까지 이어졌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그때도 내가 역사적인 것에 특별히 관심을 두고 있었는 듯 하다. 나중에 '한국적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한국영화사'를 쓰기 위한 공부 과정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대학에 입학해서도 한동안 문예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문리대 연합 문학 서클에 가입했다. 서클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국문과, 영문과, 독문과, 불문과 등 문리대 학생들이 모여 각자 문예 작품을 창작하고 합평 토론하는 모임이었다. 고교시절 문예반에 속해 있었으니 자연스럽게 이어진 경험이었다. 나도 두어번 작품 발표를 한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서클 활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영화 잡지 기자 일을 시작한 이후인 2학년에 그만 두었다.

같은 과 선배인 이어령(李御寧, 1933~2022)을 처음 만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와 알게된 것은 서울고 동기와 같은 하숙집에 있던 여자 선배 양정혜를 통해서였다. 부산 출신의 그녀는 나보다 한 학번 위53학번이었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부터 친구를 통해 자주 어울려 친해졌다. 이어령과 친했던 양정혜가 마침 서울고 교지를 보여주었고 그가 내 작품을 읽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내 작품 <소년차장>과 <수건>을 모두 고서는 내게 왜 작품을 쓰지 않느냐며  놓은 게 있으면 가져와 보여달라 했다. 내 소설의 문장이 좀 독특하게 다가왔던 모양이다. 그때도 이어령 선배는 국문과에서도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었다. 수업시간에 교수들과 논쟁하기도 했었으니. 하지만 대학시절 이후 나의 문학 창작 활동은 이어지지 못했다. 영화에 점차 깊이 빠져 지냈기 때문이다."

동숭동 문리과대학 전경. 1957년. ⓒ 서울대학교 기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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