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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연 Jul 12. 2024

학도호국단, 대학 입시, 고교 졸업

영화사가 노만 20

'형님을 보내며 문예부 일동' 1953년(단기 4286년) 3월 26일. 맨 뒷줄 왼쪽에서 네번째가 노만. ⓒ 노만, 한상언영화연구소.


"복교 이후에도 학교 안팎에서 어수선한 분위기는 지속되었다. 휴전 협정이 타결되기 직전이었다. 학도호국단에 소속되어 중앙청 앞 휴전 반대 시위에 나간 것도 기억난다. 학도호국단 학생들 뿐만 아니라 서울 시민들이 모여든 행사였다. 한겨울이었다. 서울 시내 각 중고교 학도호국단원들이 집결하여 '통일 없는 휴전은 없다'는 내용의 표어와 구호를 내걸고 가두행진을 했다. 키가 크다는 이유로 나는 기수를 맡았다. 김태선 서울시장이 연설을 했고, 태극기와 학도호국단기, 서울고등학교 교기를 든 기수들이 앞장 선 가운데 구호와 행진이 이어졌다. 나는 서울고등학교 교기를 들고 대열의 맨 앞에 나섰다.

3학년이었지만 입시 공부는 뒷전이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공부가 손에 잡힐 없었다. 마지막 남은 학기를 온종일 교지 제작에 몰두하며 보냈으니. 그럼에도 방과후에는 친구들과 모여서 함께 과외 공부를 했다. 그땐 마땅한 과외 선생이 있었던 것도 학원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 있었으니, 서로 모여 공부를 가르쳐주는 식이었다.

애초에는 서울대 문리대 미학과 진학을 희망했다. 학창시절 내내 문예 활동을 했고 예술에도 관심이 있었으니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학문을 공부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문리대에서 학과나 전공에 상관 없이 다양한 공부를 해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그 해 서울대 미학과가 문리대에서 미술대학으로 옮기면서 원서 지원을 포기했다. 담임 선생과 부모님께 아예 이야기를 꺼내기가 힘들었다. 차선으로 국문과를 선택했다. 집안에서는 난리가 났다. 아버지는 내가 의사가 되기를 원해서 의대에 진학하기를 바랬다. 그간 한 번도 내 진로 진학에 대해 말씀이 없으셨던 아버지가 입시철이 다 되어 그런 반응을 보이신 것이 당황스러웠다. 결국 국문과를 원서 1지망으로 정했다. 담임이었던 이일구 선생님을 설득했다. 마침 아버지의 평양농업전문학교 후배였던 이 선생님은 나의 결정에 대해 아버지를 뵙고 말씀드렸다. 그해 12월, 대학 입시 시험을 치루었다. 자신 없었던 수학 시험을 생각보다 잘 넘겼다. 내 수험번호가 18번이었던 것도 기억난다. 나중에 알고보니 1번부터 17번 수험생들이 탈락하고 18번인 내가 1지망인 국문과에 합격했다. 그래서 친구들인 내가 국문과 '톱'을 끊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졸업식 때는 친구 채조병과 함께 교지 제작 활동을 인정받아 공로상을 수여 받았다. 경희보 훈화 기사 필화 사건으로 수모를 주었던 김원규 교장이 직접 준 상이었다. 아이러니하게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학창 시절 내내 열정을 쏟았던 문예반과 교지 활동으로 학교를 빛냈다는 점을 인정받은 것에 보람을 느꼈다.

당시 우리 서울고 6회 동기생들은 그 해 가장 많은 인원이 서울대학교에 진학했다. 후에 서울대학교 총장이 김원규 교장에 감사장을 수여했을 정도였다. 전쟁으로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웠던 분위기 속에서 보냈던 학창시절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1954년 2월이었다."


노만이 속한 서울고등학교 6회 졸업생들은 "일제의 식민통치가 끝나고 감격적 광복을 맞이한 후 혼란 속에서 독립국가 건설을 모색하던 1947년에 입학, 6.25 동란 직후인 54년 졸업했다." 1991년 5월 25일 경향신문에 실린 <서울고 6회 이 사회 주춧돌된 '인왕바위들'>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는 서울고 6회 졸업생들의 당시 근황이 소개된 바 있다.

<서울고 6회 이 사회 주춧돌된 '인왕바위들'>, 경향신문 1991.5.25. 18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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