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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연 Jul 11. 2024

《경희보》 필화(筆禍)

영화사가 노만 19

1952년 고등학교 2학년 친구와 함께 한 노만(오른쪽). 부산 피난시절. ⓒ 노만, 한상언영화연구소.


"고등학교 3학년 때 교지 《경희》 5집에 쓴 단편소설 <수건>은 앞선 <소년차장>과는 크게 달랐다. 문장 스타일부터 크게 달랐다. 내겐 만연체 스타일의 긴 문장 보다는 짧고 정확하게 쓰는 것이 어울렸다. 긴박감 있는 장면이나 감정을 묘사할 때는 점점 짧은 문체를 구사했다. 예컨대, 소설에서 주인공이 앰뷸런스에 숨어 C레이션을 훔쳐먹는 장면이나 흑인 병사에게 몸 수색을 당하는 장면, 한국인 노무자들이 수건 도난범을 서로 추궁하는 장면에서는 이를 통해 긴박감 있고 속도감있는 분위기를 표현했다. 글을 읽으면, 독자가 바로바로 장면 묘사가 머리에 금방 들어갈 수 있게끔 했다. 이러한 소설 속 묘사나 문장 구사에 대해 특별히 선생님이나 선배들의 첨삭 지도를 받은 것도, 다른 작품에서 영향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피난 시절에도 빼놓지 않고 줄곧 써온 일기의 힘이었다. 내겐 일기 쓰기가 커다란 문장 공부이자 연습이었다. 꾸준히 쓰면서 내 스타일을 터득한 것이다.

부산에서 다시 서울로 돌아온 것은 1952년 말 무렵이었다. 그때만 해도 전쟁 중이었으니, 서울로 입성하려면 도강증을 발급받아 소지하고 있어야 했다. 다행히 사업을 하셨던 아버지가 도강증을 받아 놓은 상태였다. 나중에 어렴풋이 듣게된 것이지만, 당시 아버지는 큰 배로 전라도에서 부산으로 쌀을 운반해 와서 파는 사업을 하셨다고 한다. 서울에 올라올 때, 그때 현찰로 1억을 가지고 오셨으니 이 일로 꽤 큰 돈을 버셨던 것이다. 이것이 기반이 되어 전쟁 이후 운수업을 시작하셨던 것 같다. 우리 식구들은 이전에 살던 서대문 집에서 인현동2가에 위치한 새 집으로 이사했다. 시인 이상(李箱, 1910~1937)의 친구이자 그의 초상을 그린 것으로 유명한 화가 구본웅(具本雄, 1906~1952)이 살던 집이라고 했다. 경희궁 본교로 다시 등교했다. 막상 학교에 가보니, 본관은 주둔 영국군이 사용하고 있었고 우리 학생들은 도서관이나 체육관, 과학실 등 부속 시설로 나누어 수업을 들어야 했다.

복교 이후, 서울고 신문 《경희보》발간에도 문예반 소속으로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됐다. 당시 서울고등학교 서울 본교에서는 《경희보》, 부산 분교에서는 《서울신보》가 각각 제작, 발간되었다. 부산 분교에 다니던 2학년 때는 교지《경희》4집에 편집위원으로 참여했다. 3학년 '고참'이 되자 문예반 활동과 신문과 교지 제작 전반을 이끌었다. 

《경희보》 필화 사건을 잊을 수 없다. 신문반 후배가 김원규 교장의 학생 조회 훈화를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그대로 옮겨 실었다. 신문이 발간된 후, 교장 선생이 발칵 뒤집혔다. 어떻게 이런 내용이 그대로 나갈 수가 있느냐며 노발대발한 것이다. 정확히 기억 나진 않지만, 훈화 내용에는 교장 자신이 체면이 안 서는 이야기들이 더러 있었던 것 같다. 비교육적인 언사나 크게 부적절한 내용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자기 학교 학생들 앞에서라면 몰라도, 그것이 대외적으로 나가는 교내 신문에 '필터링' 없이 활자화된 것이 꽤 심기를 거스른 모양이었다. 따지고 보면, 그 후배가 잘못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발간을 책임지던 내가 기사를 꼼꼼히 검토했어야 했는데 후배가 어련히 했겠거니 하고 대강 넘겼던 것도 화근이었다.

호출을 받고 교장실로 갔다. 교장 선생 앞에 섰다. 네가 신문반이냐, 《경희보》 편집장이냐고 물었다. 훈화 기사를 가리키며 이것을 누가 했느냐고 물었다. 나는 기사를 쓴 후배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따귀 한 대가 날아들었다. 노발대발한 교장 선생은 누가 그 기사를 썼는지 이름을 대라며 계속 추궁했다. 후배의 이름이 밝혀졌다면 그는 당장 '퇴학'감이었다.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교장 선생도 질렸는지 내게 몇 마디의 호통을 치곤 쫓아냈다. 다행히 그것으로 이 사건은 끝났다.

이후 《경희보》는 3호를 끝으로 강제 정간되었다. 신문반도 강제 해산되었다. 난생 처음 경험한 필화 사건이었다. 과도한 처사였지만, 나로서는 문예반과 신문을 지키고 후배들을 끝까지 감쌌다. 좋아하는 일, 책임을 다해야 하는 일에는 온 힘을 쏟아 뛰어들었고 끝까지 타협하지 않았다. 그만큼 교지와 신문 만드는 일, 글쓰기에 완전히 푹 빠져 지낸, 열정적인 시절이었다."


피난 시절 운영되던 서울고 서울 경희궁 본교사(좌)와 부산 가교사(우). 서울교 교지 《경희》 4집. ⓒ 서울고총동창회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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