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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창연 Jul 18. 2024

<감독 '전창근' 씨 가정을 찾아서>(1955) ①

영화사가 노만 24

잡지 《영화세계》 1955년 11월호에 실린 기사 <명우 가정 탐방기: 감독 '전창근' 씨 가정을 찾아서>를 여기에 나누어 소개한다. 이 기사는 노만이 《영화세계》에 입사한지 약 1년 후 기자 신분으로 쓴, 가장 오래된 것으로 발견되는 단독 기사 중 하나이다. 잡지 목차에는 'R기자', 기사 본문에는 'N기자'로 명기되어있는 이 기사의 필자는 노만이었다. 1955년 10월 당시 돈암동에 있던 전창근 감독의 자택을 직접 방문한 기자 노만이 그와 나눈 인터뷰를 싣고 있는 흥미로운 기사이다.

《영화세계》1956년 11월호 표지(좌)와 'N 기자' 노만의 단독 기사 <감독 '전창근' 씨 가정을 찾아서>(우)



[명우 가정 탐방기] 감독 '전창근' 씨 가정을 찾아서

N 기자


  전창근하면 먼저 우리는 <자유만세>가 연상된다. 여기서 명연기를 보여준 이래 수개 작품에 감독을 보였고 근래 우리 영화계의 작품 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전 감독도 묵묵히 연출을 보시기에 여넘이 없으시다. 더욱 요즈음은 이광수의 원작인 <단종애사>를 맡아 동분서주하시는 전 감독의 가정을 방문하기로 했다. 아침 일찍 돈암동 종점에 내린 기자는 전 감독 댁을 찾기에 약간의 시간을 허비하며 머리 속으로는 그럴 듯한 야욕을 그려봤다. 그러나 막상 찾아보니 북향의 작으마한 한식 기와집이었다. 적어도 30년이란 세월을 오직 영화에 바치신 유명한 전 감독이 이런 북향 집에서 산다니 우리나라의 현실이 어떻하다는 걸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내방의 뜻을 전하자 막 자리에서 일어나셨는지 파쟈마 바람으로 친히 나오셔서 반가히 맞아주신다. 기자가 안내된 곳은 물론 응접실 아닌 한 칸의 온돌방이었다. 벽에는 전 감독의 사진과 나란히 부인되시는 유계선 씨의 인상화가 걸려 있었다.

  "어서들 오십시오, 이렇게 누추한 데를 찾아주셔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인사하시는 전 감독은 기자가 그리던 바와는 정반대로 스포츠 캍트하신 푸로필은 틀림 없는 쟌 갸방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조도 거친 감이 없지 않은 듯, 그러나 온화한 일면의 성격 소유자이기도 하다.

   내방한 목적을 전하고 우선 감독이 된 동기를 물었다. 전 감독은 미소를 띠우며

  "동기요? 하하...... 동기야 아주 단순했지요. 주위의 나운규 같은 친구들이 이미 그 방면에서 활약하고 있었고..."

   잠간 말씀을 끊으시더니,

   "내 고향은 함경북도 회령인데 서울에 와서 학교를 다녔고 처음엔 열심히 공부를 했는데 중학교 삼학년 부터는 그만 바람이 나가지고 (웃으신다) 바람이야 다른 게 아니고 영화구경 하는 것이지요. 고만 이렇게 영화에 미쳐서 공부도 잘 안하고 막연이 나도 배우가 됐으면 그러다가 상해로 가게 되어서 거기서 학교를 마치고는 배우가 됐지요"

   이렇게 말씀하시는 전 감독은 처음에는 열렬한 문학청년이었듯, 학교도 영화계통이 아닌 학교를 졸업하시고 독학으로 영화 공부를 하시었다고 한다.

   "그럼 상해에서 첫 활동은 어떠했읍니까?"

   "뭐 활동이라기 보다...... 하여튼 처음 '대중화 백합'에 입사해서 <애국총>, <흔란> 안중근 의사에 관한 영화에 배우로 데뷰했지요...... 이렇게 배우 생활을 해보니, 배우 보다는 역시 감독이 나은 것 같았고 더욱 배우를 움지기는 것을 보니 배우보다는 역시 감독이 제일이란 생각에 그 후 몇 작품 감독을 보았지요."

   중국에서도 지식층에서는 우리 안중근 의사에 관해서 잘 알고 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씀하시며 전 감독 자신은 한국 사람이라고 처음으론 역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그럼 거기서도(상해) 감독하신 작품이 있겠지요"

   "네, 첫 작품이 <양자강>이고 이 외 몇 작품이 있읍니다"

   "귀국하셔서 만드신 작품은?"

   "십칠년 전에 귀국하자, <복지만리>라고 그때 만주의 만주영화협회와 우리 고려영화협회의 합작으로서 우리나라의 이주민이 만주 넓은 땅을 찾아가는 내용으로 지금 보면 그리 신통치 못하지만 꽤 스케일이 넓었던 작품이 있지요"

   물론 이 작품도 <자유만세>처럼 씨나리오를 쓰셨고 직잡 감독하신 작품이다. 기자는 바쁜 시간을 뺏은 실례를 마음 속으로 사과하고 질문의 화살을 결혼으로 돌였다.

   "사모님과는 언제 결혼하셨읍니까?"

   "맏딸이 열 다섯이니 꼭 십육년 전이군요"

    손꼽으시는 전 감독은 잠간 추억에 잠기는 듯 하시더기 곧 말을 이으셨다.

   "그러니까 <복지만리>를 만들 때였지요. 그때 시골 여자의 역이 필요해서 극단 '호화선'에 관꼐하고 있던 처를 쓰게 된 데서 결합이 되었지요. 그때 처의 나이가 열여덟이었군요. 지금 열다섯, 열넷 짜리 계집애와 일곱살 제비 놈이 있으니......"

   말끝을 흐리시는 전 감독은 새삼스러히 세월이 빠름을 탄하시는 듯 했다. 그도 그럴것이 만들고 싶은 작품을 만들기엔 시간이 너무 없다고 생각하신 때문일 것이다.


(에서 계속)

전창근의 연출작 <복지만리>(1941)의 스틸컷. ⓒ 노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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