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8월, 《영화세계》를 그만 두고 난 후였다. 《국제영화》의 박봉희(朴鳳熙) 사장으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았다. 《영화세계》가 첫 선을 보인 이듬해인 1955년에 창간된 《국제영화》는 당시 《주간 국제영화뉴-스》라는 제명으로 발간된 영화 잡지였다. 박봉희 역시 영화기자 신분으로 명동을 출입하면서 줄곧 알고 지낸 인물이었다. 인천에서 기자 생활을 했다는데 그가 어떤 계기로 영화 잡지일에 뛰어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영화세계》를 그만 두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박 사장은 잡지 운영과 제작비 투자를 권했다. 일종의 공동 경영이었던 셈이다. 《영화세계》 일로 명동을 오가는 동안 박 사장 눈에 내가 함께 일할 만 한 사람으로 보였던 것 같다. 게다가 운수회사를 하는 아버님 밑에서 꽤 여유있게 지내는 것 같다며 잡지 운영과 제작 비용을 함께 부담하자고 한 것도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 나는 국제영화사 주간(主幹)으로 자리를 옮겼다.
《국제영화》의 사무실은 종로2가 100번지 한청빌딩 3층 38호에 위치해있었다. 《영화세계》와 마찬가지로 잡지사 운영 규모가 영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영화세계》와는 다른 분위기에서 일할 수 있었다. 영화와 잡지에 대해 전혀 몰랐던 《영화세계》 한창석 사장과는 달리 박봉희는 기자 출신 답게 취재와 편집, 기사 집필에 직접 나섰다. 당시 주요 멤버는 발행인이자 대표 박봉희와 나를 비롯해, 편집장 천백원(千百元), 지금은 이름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 편집부원 한 명, 기자 김시춘(金時春)이었다. 잡지 주간은 나로서도 처음 하는 일이었다. 편집장이었던 천백원과 논의하여 잡지의 기획과 구성, 기사 배치 등 전반적인 사항을 논의해나갔다. 사실상 '공동 대표', '공동 투자자'나 다름 없었으니 내가 직원들의 월급을 주기도 했다.
그해 9월 1일, 《주간 국제영화뉴-스》의 제명을 《국제영화》로 개칭했다. 잡지의 판형을 비롯해 인쇄 방식도 대대적으로 바꾸었다. 발행 주기를 주간에서 월간으로 바꾸어 지면 수를 늘였고, 기존의 타블로이드판에서 4X6배판으로 판형을 새롭게 했다. 내가 주간을 맡아 처음으로 관여한 《국제영화》 1956년 9월호(통권 11호)의 권말에 쓴 '편집후기'에서 이를 명확하게 밝혔다: "《주간 국제영화뉴-스》를 월간 《국제영화》로 개제하고 편집진을 쇄신했다. 증면과 아울러 독자와 호흡이 통할 수 있는 내용으로 노력은 아끼지 않았으나 미비한 점이 눈에 먼저 띠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더위도 한고비 지난나 보다. 독서 씨즌에는 읽거리를 많이 넣을 것을 약속하고 성원을 보내주신 영화계 및 여러분에 감사를 드린다. (로만)"
《국제영화》주간을 하면서 자부할 수 있었던 것 중 하나가 '인쇄의 혁신'이었다. 당시 잡지는 기사 본문의 활판 인쇄와 사진이 삽입된 옵셋 인쇄,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지금은 모든 공정 과정이 컴퓨터로 손쉽게 이루어지지만, 그때만 해도 활자 조판과 인쇄 과정은 매우 복잡하지 않았나. 무엇보다 제대로 된 '칼라'를 뽑아내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국제영화》의 표지와 옵셋 인쇄를 담당했던 국제문화인쇄소는 당시로서는 최신의 옵셋 인쇄기를 유일하게 보유하고 있던 곳이었다. 그때만 해도 잡지 지면의 컬러 인쇄는 4개 동판만으로만 이루어졌다. 막상 나온 인쇄물을 보면 형편 없는 것들도 많았다. 하지만 국제문화인쇄소의 옵셋은 색채를 세밀하게 분리 분석해서 선명한 색을 추출해낼 수 있었다. 첫 표지의 주인공은 배우 그레이스 켈리(Grace Kelly, 1929~1982)였다. 《키네마준보》였는지 《에이가노도모》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일본 영화잡지에서 확보한 그레이스 켈리의 화보에 에메랄드 색을 배경으로 했다. 인쇄소에서 받아본 표지 출력물을 보고 감탄했다. 제본을 마치고 배부된 잡지 3000부가 순식간에 '완판'되었다."
《영화세계》 기자 시절을 회고하는 노만. 한상언영화연구소·책방 노마만리 한상언 대표와의 인터뷰. 2024년 5월 1일 서울 공덕동 자택 인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