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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파담 Sep 21. 2024

04. 끝까지 걸어라 행복한 순례자여

3,4일차, 론세스바야스서 수비리, 팜플로나로… 몇 배 더 힘든 날들

장종혁 회장님과 성마리아성당 앞에서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출발을 시작한다.

첫 외국인 친구들이 생겼다.

에스토니아에서 온 애니카(46)와, 덴마크사람 플란다(45)다.

어제 식당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이다.

우리 테이블은 그녀들, 장 회장님 그리고 나 이렇게 4명이다.

이날 순례자메뉴는 콩스프와 파스타로 시작해서, 본식은 치킨 또는 물고기 요리가 나오고, 후식은 아이스크림으로 마무리됐다.

나는 단백질 보충을 위해 콩스프와 치킨을 선택했다.

이날 아침에도 우연히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됐다.

오늘 조식은 식빵, 햄, 치즈, 사과, 그리고 쥬스와 커피가 제공됐다.

나는 샌드위치와 커피를 마셨고, 사과는 걷는 도중 당분 보충을 위해 가방에 챙겼다.

조식을 마치고 나왔더니 하늘이 울상이다.

한 방울 한 방울 바닥을 적시더니, 이내 세차게 빗방울이 쏟아진다. 생장 출발 때와 발카로스 때도 마찬가지였다. 론세스바야스 출발 때도 비가 내렸다.

프랑스에서의 흐린 하늘과 비가 그대로 스페인에도 이어졌다. 뜨겁고 정열적인 나라인 스페인의 이미지가 완전히 무색하다. 


‘역시 오늘도 이렇게 시작하는구나!’

‘하루의 시작을 잘하기 위해 빗속에 축복의 기운을 넣어주시는 것인가!’ 

오늘 목적지는 주비리다.

장 회장님과 론세스바야스 수도원 성당인 성마리아 성당앞에서 화이팅을 하고, 다음 숙소인 주비리에서 만나기로 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길을 가고 있는데 에스토니아에서 온 애니카가 풀을 뜯고 있는 말을 스마트폰에 담고 있었다.

“내가 사진 찍어 줄까?”

내가 묻자 그녀는 나에게 스마트폰을 맡긴다.

나도 찍어준다고 하길래 사양하며 먼저 가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함께 가자고 한다.

“어디서부터 걸었어?”

“생장에서 걷기 시작했어.”

“와! 대단하다. 정말 힘들었겠네. 부럽다.”

애니카는 어제 팜플로나에서 론세스바야스로 버스로 왔다고 한다.

피레네산맥을 넘지 않고 론세스바야스에서 출발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애니카의 이런 저런 말을 들으며 함께 길을 걸었다.

그러다 갑자기 나에게 질문 세례가 쏟아졌다.

어떻게 대답해서 말을 이어가야 할지 고민됐다.

그녀의 영어가 길어진다.

한국에서 왜 산티아고가 유명한지! 팜플로나에서 어떻게 보낼 것인지를 물어오니 멍해졌다.

애니카의 유창한 영어에 잔뜩 주눅 들었다.

“애니카? 먼저 가. 난 담배 한 대 피고 천천히 갈께!”

애니카와 대화 후 혼자 남은 상태. 나는 담배를 태운 후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을 사진에 담았다.

너무 우리말에 익숙한 탓일까?

해외에 나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첫날과 둘째날은 영어가 잘 들리지 않는다.

영어 회화 능력이 부족한 나에게 실망스러웠다.

‘영어를 좀 더 잘했으면, 순례길이 더 재밌고 풍요로울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망감은 곧 나를 위로하는 마음으로 변했다.

‘네가 순례길에 왜 왔는데? 너 하느님과 대화하러 온 것 아니었어? 너 자신이 더 단단해지고 싶다며! 영어를 못하면 어때? 하느님과 대화하는 데는 문제 없자나!’

이렇게 나를 격려하며 발걸음을 내디뎠다. 

12시쯤 에로(Arro)라는 마을에 도착해 또르띠야와 커피를 시켜 점심을 즐겼다.

그 후 에로고개를 넘었다.

에로고개는 깔딱고개로, 한 순간 고도를 높여야 하는 지점이다.

론세스바야스로부터 15km를 걷게 되면 만나는 오늘의 최대의 난코스다.

이 고개를 넘어야 수비리에 도착할 수 있다.

수비리에 도착했을 때 먼저 보이는 것은 다리였다.

이 다리의 이름은 푸엔테 데 라 라비아(Puente de la Rabia)라는 멋진 이름이다.

다리 이름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광견병다리가 된다.

‘미친개다리’ 피식 웃었다.

광견병다리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게 된 연유는 다음과 같다.

수비리로 들어가기 위해 다리를 설치하는 과정에서 튼튼한 다리를 만들기 위해 강 주변 흙을 파내는 작업이 진행됐다. 그러자 그곳에서 광견병에서 보호해 주는 수호성녀 키테리아의 유해가 발견된 것이다. 이후로 교각 주변를 돌면 광견병을 치유 받게 된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한다.

광견병다리앞에 섰다. 이 다리를 건너면 수비리로 들어간다

광견병다리를 건너 숙박을 위해 공립 알베르게로 향했다.

지금은 2시 30분이지만, 공립 알베르게가 벌써 만원이라고 한다.

'벌써 꽉 찼다니.‘

알베르게 주인은 나와 장 회장님에게 오스탈(호스텔)에 머물 것을 제안해 왔다.

가격을 물으니 45유로를 제시한다.

공립 알베르게에 입실하기 위해 1인당 15유로를 내야 하니, 2인이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오스탈이 45유로면 이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That's sound good" - "네, 말 너무 좋아."

우리가 호스텔에 입실하니 2022년도에 왔다 간 사람들의 쪽지가 있었다.

쪽지의 내용은

Buen Camino Peregrinos, Ci Uediamo Alla Fine Del Mondo - Nicoco-Maria-Viola, Zoe(la perrita)

라고 적혀 있었다.

해석하면 반가워 순례자들아! 우리는 세상의 끝을 보고 왔다. 니코코, 마리아, 비올라, 죠(개)

la perrita라는 말은 개라는 단어였다. 이 때문에 한참을 생각했다.

그리고 결국 해석해 냈다.

니코코와 마리아, 비올라가 죠라는 애완견과 함께 순례길을 완주했던 것이리라.

수비리는 '개 판'이다.

마을입구부터 숙소까지 개 이야기뿐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저녁 9시 꿈나라로 향했다.


사발디카 마을로 들어가는 다리. 오늘은 아르가 강 줄기를 따라 길을 걷기 때문에 건너야 다리도 많다

오늘은 팜플로나로 간다.

팜플로나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공부하면서 자주 들여다봤던 곳이다.

소몰이와 투우로 유명한 산페르민 축제, 헤밍웨이의 "태양이 떠오른다"의 주무대, 그리고 예쁜 골목들로 유명하다.

또 순례길을 동안 팜플로나에서 29일짜리 1차 유심를 구매해야, 레온에서 다시 29일짜리를 사는 합리적 소비생활이 가능하다는 정보들이다.


주비리에서 팜플로나로 가는 길은 경사가 거의 없다. 마지막 깔딱고개를 만나기 전까지는

오늘은 비도 없고 햇빛이 쨍쨍하다.

주비리에서 팜플로나로 가는 길은 오솔길이 많아 좋았다.

기분좋은 상태로 걷고 있는데, 앞에 가는 분은 나와 전혀 다른 분위기다.

배낭을 길에 내려놓고 힘겹게 숨을 쉬며 앉아 있는 사람이다.

가까이 가니 이전 발카로스의 알베르게에서 만났던 적 있는 필리핀 분이셨다.인이었다.

괜찮냐고 물어보니 손사래를 치며 죽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발카로스에서 '관리인에게 전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줘서 고맙다'고 감사를 전했었지만, 언제 다시 만날까 싶어 다시 한번 고마움을 표하고 싶었다.

"발카로스에서 당신 덕분에 잠을 편히 잘 수 있었어. 정말 고마웠어."

"아니야.“

간략한 대화를 나누면서 그의 국적과 이름을 물었다.

"이름이 뭐니?"

"벨“

그의 대답에 "링어링? 벨?"

"노노, 뷀"

"스펠로 알려줘"

"V-e-l-l“

"알았어. 벨이구나!“

벨 역시 내 이름을 물어왔다.

내 이름을 전혀 발음하지 못했다.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천천히 말했더니, 내게 들려온 이름은 나도 모르는 사람 이름이다.

내 발음이 부족한 것을 탓하며, 내 이름을 다시 알려줬다.

"My name is Yoon" - 나는 윤이야.

그제서야 "윤"이라고 정확히 발음했다.

벨과 이름만 얘기하는 데도 10분이 훌쩍 지났다.

벨과의 대화는 이름 외에도 나이와 국적, 오늘의 목적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벨도 오늘 팜플로나까지 간다고 한다. 잘 쉬고 조심히 오라는 인사를 전하고 먼저 팜플로나로 향했다.

미라발레 고개를 넘어가는 길. 이 고개를 넘어가면 팜플로나가 눈에 들어온다

한참을 걷다가 사발디카라는 마을에 카페가 들러 간단한 식사를 했다.

바로 옆에 스테파노 성당이 있어 들어갔다.

스테파노 성당(경당)에 들어가자마자 입구에 놓여있는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 한글로 적힌 종이를 신기해하며 쳐다봤다.


‘순례자의 행복’

종이 한 장을 집어 들고 뒤편 의자에 앉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갔다.

행복하여라. 순례자여......

계속 읽어 내려가면서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러나 아홉 번째 글과 열 번째 글은 꼭 나에게 말하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해져 온다. 

‘행복하여라 순례자여, 당신이 이 길에서 참된 자신을 만나게 되고, 서둘지 않고 충분히 마음속에 그 이미지를 간직할 수 있다면. 순례자여, 이 길이 큰 침묵을 품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그 침묵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하느님을 만나는 기도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대는 정녕 행복하여라’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다.

대화는 서로 주고 받는 이야기다.

나는 하느님과 대화해 본 적이 있던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열쇠는 침묵이다.

그냥 침묵하고 기다려라.

그러면 응답을 받을 것이다. 

‘하느님! 저는 당신의 말이 들리지 않아요. 내 귀는 당신께 열려 있지 않아요. 내 마음은 세상의 것에 익숙해져 있나 봐요. 저에게 욕심뿐인가봐요. 단단해진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겠어요.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이런 기도가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순례길을 걷는 내 마음이 완전히 무너지는 순간이다.

단단해지고 싶다는 결심이 진정 나에게 필요한 것인지 의심스러워졌다.

행복해지기 위해 더 단단해지고, 행복해지기 위해 더 열리고, 행복해지기 위해 지혜와 평화가 무엇인지 성찰해 왔는데,

참된 행복은 그 분의 응답을 듣는 것이라 느껴졌다.

막달레나 다리 위에서

사발디카를 뒤로 하고 팜플로나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오늘도 깔딱고개다. 고개를 넘으니 마을들이 보인다.

도로변 인도를 따라 한참을 걸으니 막달레나 다리가 나왔다.

막달레나 다리를 건너면 팜플로나 시내다.

오늘 팜플로나에 도착한 시간은 2시 30분.

나와 장 회장님은 어제 예약한 알로하 오스탈(호스텔)에 체크인하기 위해 비아나 광장으로 향했다.

알로하 호스텔은 2성급으로 저렴한 숙소. 오늘과 내일, 연박을 예약했기 때문에 숙소에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내일은 걷지 않아도 된다.’

팜플로나 들어가는 막달레나 다리. 막달레나 다리는 12세기에 만들어져 800년동안 여전히 프랑스길을 통해 온 순례자들을 반갑게 맞아주고 있다

팜플로나라는 이름은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내분이 있던 당시, 카이사르 군대의 장군인 폼파엘로라는 사람이 이 곳에 막사를 지어 생겨난 이름이라고 한다.

폼파엘로가 변형돼 팜플로나가 된 것이다.

이 도시는 ‘이루나’라는 다른 이름도 가지고 있다. 이루나라는 말은 바크스 언어로 도시라는 뜻이란다.

이 지역에 바스크인들이 거주했던 시기는 기원전 3,000년전부터라고 하니, 도시 이름이 ‘팜플로나’보다 ‘이루나’가 더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바스크인들에 대해 알아보면서 슬픈 역사를 가진 민족임을 알게 됐다.

스페인 내전 당시 독일군이 게르니카 일대를 폭격한 사건이 있었다.

게르니카는 바스크인들이 거주하는 동네다. 이 마을이 폭격 당해 천여명의 민간인이 희생된 것이다.

당시 스페인 독재자로 알려진 프랑코(국민당) 정권의 홍보지였던 아리바 신문은 12명이 폭격으로 희생됐다고 발표했다. 또 독일 나치측은 공화당 군인들이 게르니카를 떠나면서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발표했다.

이 발표는 진실이 은폐된 자작극이다.

게르니카의 비극이 밝혀진 것은 피카소에 의해서다. 피카소는 <게르니카>를 그려 발표했고, 온 천하가 프랑코와 나치의 만행을 알게 됐다.

마드리드에 가면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관에 가서 바스크인들의 비극을 그린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꼭 봐야겠다 결심했다.

알로하 호스텔에서 바라본 팜플로나 시내 전경

오늘은 신라면이다.

한국에서부터 스페인의 아시아마트를 모두 기록해놨다.

순례길에서 첫 번째 만나는 아시아마트는 팜플로나에 있다. 구글지도를 이용해 마트에 도착하니, 신라면이 있었다. 컵라면 2개를 사서 숙소로 가져와 저녁을 먹었다.

‘컵라면! 오늘 저녁은 최고다’

팜플로나의 비아나광장. 비아나광장은 카스티요광장에 이어져 있으며, 도심 상업지구와 구도심을 연결하는 사통팔달의 요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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