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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파담 Sep 21. 2024

06. 용서,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

6일차, 용서의 언덕과 여왕의 다리가 있는 마을 푸엔테 라 레이나로

팜플로나 대성당을 출발하면 이쪽 성벽길로 안내한다. 여기서부터 팜플로나 성터로 이어지는 길은 도시를 빙 둘러 이어진다

팜플로나를 떠나는 길은 꽤 길었다.

부엔카미노앱(BuenCaminoApp)이 안내한 길은 도시를 빙 돌아 나가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앱에서 제시한 길은 팜플로나대성당을 출발해 시청을 지나 산 사투르니노 성당을 거쳐, 팜플로나 성벽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중간 중간 헷갈리는 구간도 나온다.

어느 쪽으로 갈지 망설이고 있으면 어디선가 천사가 나타난다.

팜플로나 주민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웃으며 손가락으로 저쪽으로 가라고 알려주기 때문이다.

팜플로나 성벽은 어제 저녁 KFC 패스트푸드점까지 걸었던 길에 위치해 있었다.

우리가 머물렀던 숙소에서 성벽까지의 거리는 10분정도였기에, 빙 돌아 성벽을 다시 보는 순간 둘러서 걸어온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1시간 30분 걸려 팜플로나를 벗어나니 도시의 풍경이 천천히 초원으로 변해갔다.

풍경이 변하면서 하늘 역시 먹구름으로 뒤덮였다.

비가 오고 그침을 반복하니, 나 역시 우비를 입었다 벗었다를 반복하는 상황이다.

평탄한 초원이 끝나자 어느새 깔딱고개가 나타났다.

풍력발전기가 산 능선에 가득히 설치된 것을 보자마자 여기가 페르돈(Alto del Perdon) 고개라는 곳임을 직감했다.

페르돈 고개는 용서의 언덕이라 불리는 조형물이 있는 곳으로 순례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장소다.

용서의 언덕은 오르막이 길어 체력소모가 많고, 그늘이 전혀 없어 태양, 비, 바람을 오롯이 받아오는 힘든곳이다. 용서의 언덕이라는 이름은 생긴 이유는 서로 죽일 듯이 미워하는 사람들이라도 함께 힘들게 오르는 동안 서로 의지하고 더 가까워져 용서의 마음이 싹트기 때문이란다.

앞에 보이는 산이 페르돈 고개다. 저 고개의 꼭대기에 용서의 언덕이 있다

장 회장님은 오르막을 제대로 오르지 못하신다.

젊은 시절, 왼쪽 무릎을 다쳐서 다리 길이가 서로 다르다고 하셨다. 그래서 오르막길을 걸을 때 한쪽 발이 올라가지 않아 몇 배 더 힘이 든다고 했다.

장 회장님께 대단하신 분이라고 칭찬하니, 나에게 폐 끼치기 싫어 정신력으로 버틴다고 하신다. 

땀을 뻘뻘 흘리며 용서의 언덕에 올랐을 땐 바람이 강하게 불어와 시원한 기분이다.

장 회장님과 용서의 언덕에서 순례자 조형물을 따라하며 놀고 있었는데, 다른 순례자 한명이 올라와 우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녀와 대화하는 도중 사투리가 섞인 말투가 전라남도나 광주광역시 출신임을 알게 됐다.

어디에서 왔냐고 물으니 광주에서 왔다고 한다.

그녀의 첫 순례기는 황당무계했다. 여기까지 오는데 고작 이틀 걸렸다.

어젯는 팜플로나 인근까지 50여km를 걸었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 새벽에 출발해 팜플로나를 지나 용서의 언덕까지 왔다고 했다.

그녀는 어제 50km를 걷는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을 얘기하면서 혹시 노숙하게 될까봐 무서워 눈물까지 흘렸다며 ‘자신이 미쳤다’고 하소연한다. 

정말 대단한 여성이다. 우리는 생장부터 발카로스를 지나 이바네타 고개를 넘어 론세스바야스까지 가는 27km의 여정을 이틀에 걸쳐 오는것도 힘들었는데, 이를 뛰어넘어 수비리까지 통과한 그녀다.

철인이 아니면 상상 되지 않을 정도로 힘든 여정을 그녀가 해냈다.

장 회장님은 그런 그녀가 안쓰러웠는지 우리농이라고 쓰인 봉지에서 감말랭이를 꺼내 그녀에게 나눠줬다.

그녀는 우리농을 알아보고, 자신도 천주교 신자임을 밝히며 우리가 어디 성당에 다니는지 물어왔다.

그녀의 이름은 김예솔(38)로, 세례명은 사라다.

장 회장님은 오랜만에 한국 사람과 대화하게 돼 즐거워하는 듯 했다.

입이 쉬질 않았다.

우리들은 용서의 언덕에서 한참동안 얘기를 나눈 후 헤어졌다.

김예솔씨가 먼저 내려가고, 나는 잠시 용서의 언덕에 조금만 더 있겠다고 하고 장 회장님을 먼저 내려보냈다.

용서의 언덕에서 앞으로 가야할 길을 담아 봤다. 저 멀리 푸엔테 라 레이나가 있겠지?

용서의 언덕에 올랐으니, 무엇인가를 용서해야 하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내가 용서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순간 몇몇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 머릿속에 그려진 그 사람들을 용서할 생각이 난 없어’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나기 1년 전, 나는 큰 상처를 입은 일 있었다.

그 상황에 분노한 나는 문규현 신부님께 상담을 요청했다.

신부님은 내 얘기를 듣고 한마디 하셨다.

“너 이제 용서하지 않으면 어떻게 나아갈래?”

당시엔 이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어느정도 용서와 나아감이 어떤 관계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

그들은 나에게 상처를 준 사실조차 아무런 관심도 품지 않는다.

나에게 상처를 줬는지, 그것이 상처인지 조차 관심조차 없는 사람일 수 도 있다. 

설상 안다 하더라도, 그런 일에 대해 비웃기나 할 것이다. 

용서에는 타인이 존재하지 않는것만 같다.

용서는 오로지 나와 자신의 관계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용서하지 못해 나를 괴롭히고 있는 것도 나 자신이 된다.

용서는 내가 나에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나 자신을 용서함으로써 나는 단단해질 수 있고, 그 자체가 용서하는 것을 깨달았다. 

용서의 언덕의 바람은 매섭다. 용서를 깨닫고 나니 매서웠던 바람이 나를 따뜻하게 감싸는 산들바람처럼 변하는 느낌이다.


오바노스마을의 세례자 요한 성당이다. 이 성당은 부활절 다음날에 성 요한 상에 물을 부는 예식이 따로 있다고 한다

용서의 언덕을 지나서부터 다시 평평한 길이 이어졌다.

오늘의 목적지는 푸엔테 라 레이나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꼭 들려야 할 성당이 오바노스 마을에 있다.

이 마을에서 세례자 요한 성당(Iglesia de San Juan Bautista)을 볼 수 있는데, 이 성당 내부에는 성 윌리엄의 유골이 은으로 된 유골함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내가 이곳을 지나갈 때 성당 문이 잠겨 있어 아쉬움을 남기고 발걸음을 돌렸다.

오바노스를 지나 푸엔테 라 레이나에 도착했다.

푸엔테 라 레이나는 "여왕의 다리"를 의미하며, 11세기에 아르가 강을 건너기 위해 지은 다리에서 유래되었다.

이 다리는 나바라 왕비의 지시로 순례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푸엔테 라 레이나의 공립 알베르게는 숙박료가 7유로로 가장 저렴했다.

이렇게 저렴한 이유는 성당에서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설이 좋지는 않지만 가성비로 보면 최고의 숙소다.

당시에는 알지 못했지만, 코덱스 칼리스티누스에는 이곳에서 경배해야 할 성상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산티아고 성당 내부 경당에 야고보상이 있다. 한 손에 지팡이를 들고 다른 손에는 외투를 쥐고 있는 모습이다.

코덱스 칼릭스티누스는 순례자는 이 야고보상을 반드시 봐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11세기에 건설된 여왕의 다리(푸엔테 라 레이나)다. 아르가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다. 칼릭스티누스 책에 아르가 강은 좋은 강으로 표시돼 있다.

또, 푸엔테 라 레이나는 다양한 프랑스 길에서 출발한 순례자들이 한 길로 만나는 장소였다.

순례길을 떠나기 전 미리 이 책을 알지 못했던 것에 아쉬움이 남는다. 

푸엔테 라 레이나에서 만난 한국인들과 함께 저녁만찬을 즐겼다.

용서의 언덕에서 만난 김예솔씨, 중학교 교사라는 여성분, 장 회장님과 함께 산티아고 성당 옆 식당에서 순례자메뉴를 시켜 함께 먹었다.

중학교 선생님이라는 여성분과의 첫 만남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당황스러움이다.

12명이 한방을 쓰는 방에 배정받았는데, 배낭을 풀면서 그녀와 인사를 나눴다.

순례자들은 일반적으로 배낭을 메고 다니는데, 그녀는 큼직한 캐리어를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캐리어를 끌고 왔는지 물었더니, 동키 서비스(배달 서비스)를 이용해 캐리어만 먼저 숙소로 보내고 걸어서 왔다고 한다. 휴가를 내서 왔기 때문에 잠깐 동안 순례길을 경험한 후 앞으로 스페인 관광에 나선다고 한다.

아무튼 캐리어를 끌고 나타난 순례자는 나에게 참신한 사람이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곳은 언제나 흥미로워 보인다.

각자의 생각과 행동이 다양하게 엮여 있으며, 예측할 수 없는 충만한 상황들이 언제나 벌어지고 있다.

나와는 다른 사람들, 그들은 늘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다.

타인의 눈치를 살펴 가며 살지 않는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중요한 것 같다.

오늘은 그런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흥미진진한 하루였다.

산티아고 성당에서의 미사. 푸엔테 라 레이나라는 마을은 순례자들로 인해 생긴 마을이기에 마을 주민 대다수의 신심이 깊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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