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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파담 Oct 11. 2024

23. 치유와 용서의 문

29, 30일차_스페인하숙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 그리고 갈리시아 

폰페라다는 철로만든 다리라는 뜻이다. 이 다리는 철골 구조물로 한가득이다.

오늘은 예수부활대축일이다.

새벽에 짐을 꾸려 폰페라다를 출발했다.

오늘은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Villafranca Del Bierzo)까지 25km를 걷는다. 

크루세이로 데 푸엔테스누에바스다. 십자가 한면에는 예수님 메달려 계시며 다른 한쪽은 야고보상이 서 있다.

크루세이로 데 푸엔테스누에바스(Cruceiro de Fuentesnuevas)에 도착했을 때다.

그동안 걸으면서 장종혁 회장님의 인생이야기는 많이 들었었다.

긴 시간 동안 함께 걸으면 옆 사람의 인생을 함께 나눌 수 밖에 없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어려움들이 있었는지.

살면서 고통스러웠던 순간들.

즐거웠던 시간들.

지금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과 행동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등등. 

장 회장님은 많은 역경을 경험하셨던 분이시다.

어쩌면 그의 강한 정신력은 힘든 일들을 경험하면서 얻게 된 것이었다보다.

오늘은 회장님과 가족 이야기를 나눴다.

가족이 가져오는 기쁨과 행복, 그리고 가족이 서로에게 주는 상처를 생각하게 되는 시간이다.

한참을 얘기하다 쉼터가 나왔다.

그 쉼터의 이름이 크루세이로 데 푸엔테스누에바스다. 

“회장님? 회장님을 위한 노래가 생각났어요. 이 노래 한번 들어보실래요?”

“뭔데? 한번 들려줘 봐!” 

나는 회장님께 ‘나 가진 재물 없으나(노래 한설희)’를 들려드렸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들었던 가스펠송 중 하나다.

서문교회에 다니는 동창생이 자주 들었던 노래라 나 역시 가스펠송을 많이 알고 있었다.

이 찬송곡은 송명희 시인의 시에 음을 입힌 것이다.

1963년생인 송명희씨 태어날 때부터 중증뇌성마비 환자였다.

어린시절, 머리는 스폰지처럼 만지면 푹푹 들어갔고, 등에 업힐때면 머리가 허리 아래로 휘어버리는 흐느적거리는 몸이었다고 한다. 항상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다 보니 죽고 싶은 마음만 한가득이었다는 고백이 있다.

그녀가 16살이던 어느 날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하루는 성경을 읽는데 자신의 머리 위에 빛이 반짝이더란다. 감격해서 기도하는데 괴로움과 고통이 사라지고 기쁜 마음으로 변하면서 찬송을 하고 싶은 열망이 가득했다고 한다.

이후 하나님을 찬양하는 뇌성마비 시인으로 등극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이 노래의 가사가 된 그 시는 자신이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찬송이라고 한다.

잘 쥐어지지 않는 토막 연필을 잡고 30분에서 1시간동안 한글자도 완성치 못하는 고통속에 울먹이며 썼던 시라고 고백했다.

너무 고통스러웠던 어느 날 ‘내가 말하는 방법 써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자신의 고백을 담은 제목의 시는 ‘나 같은 재물은 나’ 다.

고통속에서 완벽한 자신의 고백의 시가 탄생한 것이다. 

이 노래를 다 듣고 난 후 장 회장님의 분위기가 이상하다.

회장님의 눈을 보니 눈물이 고여있다.

시간이 조금 지나 울먹이는 목소리로 소리내신다.

“윤 국장? 이 노래! 내 노래네!”

이 짧은 한미디 말 속에 그동안의 회한이 생각나신것 같았다.

회장님이 지금 치유되고 있는 순간이다. 

오늘은 부활대축일이다. 성모마리아 성당 옆문으로 예수님 성상이 성당안으로 옮겨지고 있다.

목적지까지 가기 전 몇 개의 마을을 지나치는데, 기억에 남는 마을은 카카벨로스(Cacabelos)다.

카카벨로스는 작은 마을이다보니 부활대축일 미사 행렬도 조촐하게 치러지고 있다.

성모마리아성당(Iglesia de nuestra senora de la Plaza)신자들이 모여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 성상이 입장하고, 그 뒤를 신자들이 따른다.

가는 길목에 관악대가 행렬을 맞아 연주를 울린다. 

이 마을을 통과하면, 갑자기 길이 가파르다.

여기까지는 도로변 평지길을 계속 걷기 때문에 편하게 왔다.

‘그럼 그렇지! 역시 그냥 편하게 둘리 없어!’

목적지인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에 가기 위해서는 오르막길을 걸어야 한다. 

이날도 장 회장님을 앞서 보냈다.

회장님은 비야프랑카에 일찍 도착하셨다.

마을 입구 알베르게 앞에서 배낭을 등에 대고 한동안 누워계셨다고 한다.

내가 마을에 도착한 후 함께 쉬며, 오늘 머물 알베르게를 찾아봤다.

검색하면서 알게 된 것이 여기가 tvN 예능프로그램 스페인하숙의 촬영지란다.

산책할 때 촬영지도 둘러 봤는데, 한국어로 ‘들어오지 마시오’가 쓰여있다.

촬영장소는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의 ‘산 니톨라스 엘 레알 호텔(San Nicolas El Real)’ 뒤편 건물이다.

배우는 차승원과 유해진, 배정남으로, 이들이 순례자에게 숙박과 요리를 제공했다.

한국에서 출발하기 전 스페인하숙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먹고 마시는 프로그램은 내 관심사가 아니었기에 사전에 알아 본 내용은 전혀 없었다.

산 니콜라스 엘 레알 호텔(San Nicolas el Real)과 오른편에 보이는 철문으로 들어가면 스페인 하숙을 촬영했던 알베르게가 나온다.

우리는 숙소로 알베르게 레오(Albergue Leo)를 선택했다. 이 마을에서 평점이 최고였다.

부엔카미노 앱에 ‘최고의 숙소’라는 마크도 붙어있어, 고민할 필요 없이 이곳으로 향했다.

숙소에 도착하니 1명만 숙박이 가능하다고 한다.

알베르게 주인이 미안했는지 우리가 머물 알베르게를 소개시켜 주겠다고 한다.

그곳 주인과 전화통화를 하더니, 알베르게 위치를 알려주셨다.

우리가 소개받은 숙소는 알베르게 데 라 피에드라(Albergue de la Piedra)다.

피에드라는 바위라는 뜻이다.

피에드라 알베르게의 특징은 절벽에 붙여 집을 지었다는 점이다.

내부에 바위가 그대로 드러나 자연과의 어울림이 환상적인 인테리어였다. 너무 신기하고 멋있었다.

이 알베르게는 3층으로 구성돼 있다.

1층은 응접실과 식당, 2층은 2인실 숙소, 3층은 함께 잠을 자는 창고같은 다인실이다.

장 회장님과 나는 3층 다인실로 들어갔다. 3층 시설도 훌륭하다.

이 알베르게는 깨끗함을 넘어 쾌적함이 넘쳐 흐른다.

3층 창문을 열어놓으니 발카르세강(Rio Valcarce)에서 흐르는 시원한 물소리가 들어오고, 높은 곳에서 보는 강의 모습까지 시각과 청각을 모두 기쁘게 해준다.

다만 샤워나 세탁은 2층에 내려와서 모두 해결해야 한다.

마을에 도착한 후 순례자의 일상을 시작했다.

피에드라 알베르게 내부 모습. 바위돌이 이렇게 이곳저곳 튀어나와 있다.

그런데, 2층 2인실에서 한국분들이 나오셨다.

“어디에서 오셨어요.”

한국말은 어디에서 들어도 반갑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전주에서 왔어요.”

“그렇구나! 우리는 서울에서 왔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이규석(65)씨로 장종혁 회장님과 같은 58년 개띠였다. 다른 한분은 김홍경(67)씨로 이 두분은 순례길에서 만나 함께 걷게 됐다고 한다.

이규석씨는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나에게 ‘아직도 담배를 피우냐’며 뭐라 하신다.

그 분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트레킹으로 오셨다고 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걷고 싶은 길 버킷리스트였다.

재미난 말씀을 이어 가셨다.

자신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은 ‘미친 사람들’ 이라고 생각한단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미친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규석씨는 아직까지도 발에 물집이 안떨어졌다.

물집이 아물면 다른 자리에 다시 생겨 걷는 내내 물집으로 고통받으며 걷고 있었다.

‘고통이 얼마나 심하면 미친 사람들의 순례길로 표현할까!’

장 회장님도 ‘맞다’ 며 맞장구를 쳐주신다.

그런데, 이 두 분의 ‘미친 사람들’ 이야기가 30분이 넘도록 계속됐다.

오랫동안 들으니 더 이상 장난처럼 들리지 않았다.

귀에 거슬려 먼저 자리에서 피했다.

나중에 회장님께 ‘산티아고 순례길을 미친 사람들의 길로 몰아세운 것’은 무척 불쾌했다고 이야기를 따로 전했다.

‘미친 사람들의 길이면 왜 자꾸 걸어? 지금이라도 점프하시면 될텐데.’

이후 3일동안 계속 마주쳤다.

그 때마다 한국사람을 만나면 ‘저 사람도 미친 사람이야!’ 라는 표현을 하셨다.

제발 그분의 미쳤다는 말 속에는 좋은 의미가 담겨있었으면 좋겠다.

산티아고성당과 용서의 문. 용서의 문은 길에서 바로 볼 수 있다.

저녁이 돼 비야프랑카를 산책했다.

이곳에서 봐야 할 장소는 산티아고 성당(Iglesia de Santiago)이다.

성당에 용서의문(Puerta del Pardon)이 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가지 못한 순례자라도 이 문을 통과하면 이곳에서 축복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은 1186년 아스토르가 주교가 교황의 칙서를 받은 때부터 시행됐다고 한다.

그리고, 이 용서의 문은 ‘희년’에만 열린다. 산티아고대성당의 성문(거룩함의 문, Porta Santa)이 열리는 ‘희년’에 이곳 용서의 문도 함께 열린다.

단, 이곳에서 용서의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순례자가 질병이나 신체적 문제점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야하는 조건이 있다.  

반가운 얼굴들이 속속 도착한다.

순례길의 스승이자 동반자인 벨.

한참을 폰페라다에서 놀다가 버스로 이곳에 점프해온 최영화씨.

함께 부활성야미사를 드렸던 그레이타. 

순례길은 함께 걷는 또 다른 예수님이 한가득이다.


오늘은 오세브레이로로 간다. 길의 초반부는 이렇게 도로길을 계속 따라가도록 만들어져 있다.

오늘은 오세브레이로까지 28km를 걷는다.

30여km를 가야 하기에 조금 일찍 서둘렀다.

지금은 6시 30분.

밖은 칠흑같이 어둡다.

이런 날에는 주변 순례자들이 깨지 않도록 하기 위해 침낭위에 모든 잡동사니를 올려놓고, 한 꾸러미를 들어 1층 응접실로 조심스럽게 들고 내려와야 한다.

장 회장님과 1층에서 배낭을 꾸리고 있는데, 2층 2인실에서 주무셨던 이규석(65), 김홍경(67)씨가 길을 떠날 채비를 마치고 내려오셨다.

캄캄한 새벽! 그분들의 뒤를 이어 우리도 길을 떠났다. 

오늘은 드디어 갈리시아 지방으로 들어간다.

갈리시아에 들어서는 십자가 표지(Punto de entrada a Galicia)를 넘으면 카스티야 이 레온 지방과는 안녕이다.

그러나, 이 표지를 만나려면 단단한 각오가 필요하다.

험한 산을 올라야만 하기 때문이다.

베가 데 발카르세(Vega de Valcarce 마을에 있는 마리아 막달레나성당 내부 모습. 제대화 중앙에 있는 성상이 마리아 막달레나다.

장 회장님과 오르막 시작 지점인 라스 에레리아스(Las Herrerias)라는 마을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다.

이규석씨와 김홍경씨가 쉼터에서 휴식을 취하고 계셨다.

그런데 갑자기 자전거를 타고 오던 한 순례자가 우리 앞에 멈춰서서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혹시 한국분들이세요?”

그분은 우리가 반가웠는지 옆 카페에 가서 커피 한잔 하자고 제안하셨다.

그동안 자전거로 순례하는 과정에서 힘들었던 일들은 쏟아내시기 시작했다.

그분의 나이는 어림잡아 60대 초반으로 보였다.

지난 2월에(지금은 4월초임) 스페인에 들어와 자전거로 산티아고 북쪽길를 왕복했다고 한다.

지금은 프랑스길을 가고 있다고.

이것이 끝나면 마드리드와 세비야까지 스페인 남부로 이동할 계획이란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표는 6월말 티켓이어서 아직 해야 할 일이 많다고 한다.

그러면서, 북쪽길을 가던 과정에서 죽을뻔한 일을 털어놓으셨다.

처음 북쪽길을 출발했던 2월은 추위는 물론 눈도 많이 내린다고 한다.

하루는 눈이 너무 많이 내렸단다.

알베르게 주인은 이런 날에는 가지 말라고 강하게 말렸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가야 한다는 생각에 길을 나섰다고 했다.

함박눈이 너무 심하게 쏟아져 얼마지나지 않아 차도, 사람도 없고, 길도, 그 무엇도 찾을 수 없는 하얀 세상위에 홀로 서있는 상태가 됐다고 토로했다.

그때 ‘여기서 죽겠구나!’ 하는 공포가 밀려왔다고 한다.

알베르게 주인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이 너무도 후회됐다고 했다.

‘오직 살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단다.

당황한 시간속에 어찌저찌 두려움에 떨며 내려왔고, 이내 마을을 눈에 들어오자 드디어 살았구나 하는 안도심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스페인 사람들이 조심하라는 전해주면, 꼭 마음에 담아두고 행동하라고 우리에게 주의를 준다.

‘자전거 순례자분이 마지막까지 잘 순례를 잘 마치고 한국에 돌아오셨으면 좋겠다.’

오세브레이로로 들어가기 전 라 라구나 데 카스티야 마을에서 본 풍경

다시 길에 올랐다.

이제부터는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야 한다.

돌이켜보면 오세브레이로까지 가는 구간은 제2의 피레네라고 표현하고 싶다.

계속 계속, 끊임없이, 그리고 가파르게 올라간다.

저 멀리 보이는 산 능선에는 꽃동산이 황홀하게 펼쳐져 있다.

마치 봄 철쭉이 만개한 지리산 바래봉이 생각날 정도다.

장 회장님은 오르막길에서 속도를 내지 못하신다.

장 회장님은 젊은 시절 발을 다치셨기 때문이다.

왼발과 오른발의 길이가 다르다고 한다.

그래서, 오르막길에서는 한 발이 자꾸 땅에 걸려 더 걷기 어려워진다고 수차례 말씀하셨다.

실제 오르막길에서는 많이 늦으셨다.

나는 몸상태가 좋지 않아 회장님을 앞서 보낼 요량으로 ‘라구나’ 마을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후 먼저 출발하시길 청했다.

장 회장님은 이규석씨, 김홍경씨와 함께 앞서 길을 나섰다.

나는 카페에서 남아 따사로운 햇살과 함께 음악을 들으며 혼자만의 여유를 즐겼다.

여기서부터 갈리시아입니다 라는 갈리시아를 알리는 표지판(Punto de entrada a Galicia)이다.

오르막길은 정말 힘들었다.

두어시간을 올랐을까! 드디어 ‘라 라구나’ 마을에 도착했다.

그런데, 회장님이 보이지 않는다. 회장님께 메시지를 보내니 내 뒤에 계셨다.

알고 보니 이규석씨와 오르막길 도중에 있던 카페에서 점심을 드셨다고 한다.

그 카페에서 내가 올라오는 것을 보면 함께 갈 생각이셨는데 나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회장님이 이 마을로 올라오기까지 1시간 이상을 족히 기다렸던 것 같다.

나 역시 이 마을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마을을 둘러보며 시간을 보냈다.

내가 한참을 서성이니 알베르게 주인이 여기에서 머물 거냐며 말을 걸어온다.

나는 오세브레이로까지 가야 한다고 전하고, 지금 동료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이 마을은 산 중턱 머리에 있는 마을이라 바람이 강하게 불고, 소똥냄새도 진하게 풍겨오는 장소다.

한동안 앉아 있으니 머리도 아프고, 추위로 인해 몸이 덜덜 떨렸다.

‘대체 언제 올라오시는 걸까!’

회장님이 미치도록 보고 싶은 상태다.

회장님이 내 눈에 보이는 순간에는 기분이 정말 좋지 않았다.

‘꾀를 내서 먼저 보냈더니, 되레 한방 먹은 기분이다.’

지금 나는 입술이 트고, 입술 위에 종기 같은 포진이 커지고 있는 상태다.

피곤하거나 영양결핍, 면역력이 떨어졌을 때 나타나는 반응이라고 한다.

‘이규석씨랑 점심 먹고 오느라 늦었네. 윤 국장 올라오는 것 보면 함께 가려고 기다렸는데 못 봤나 보네.’

엄청 짜증이 났었다.

‘화를 내면 무엇하리! 짜증 내면 무엇하리! 다 부질없는 것을!’

순례길을 걸어서 그런지 몰라도 이제는 그저 받아들일 뿐 짜증 내는 것도 싫어진다.

“회장님? 출발하시죠! 오 세브레이로까지 아직 갈 길이 멀어요.” 

드디어 갈리시아 표지판이다.

표지판을 넘어 조금만 가면 오세브레이로에 도착한다.

오세브레이로는 프랑스길에서 갈리시아 지방에서 만나는 첫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기적의 성당으로 불리는 성모마리아성당(Iglesia de Santa Maria Real)이 있다.

이 마을에는 후안 산틴이라는 한 농부가 살고 있었단다.

그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미사를 거르지 않는 독실한 신자였다.

눈보라가 몰아치던 어느 날 이 성당의 주임신부는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혼자 미사를 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추위로 인해 거의 반 죽음 상태가 된 후안 산틴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 신부는 그를 비웃으며 이렇게 말했단다.

“거센 눈보라와 피로를 무릅쓰고 왔나? 그놈의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고 싶어서인가?”

그때 빵과 포도주가 살과 피로 변하는 ‘성체의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성체성사의 신비를 믿지 않는 그 신부를 하느님이 크게 꾸중하는 기적이 이 성당에서 일어난 것이다. 

‘성체의 기적’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내 마음은 편치 않다.

옛날 이탈리아에 갔을 때, 교황님의 휴양지로 알려진 오르비에토에 간 적이 있다.

오르비에토 두오모(두오모는 주교좌성당을 뜻한다)은 교황님이 ‘성체성혈대축일’에 미사를 거행하는 성당이다.

1263년 보헤미아에서 온 한 사제가 오르비에토 남쪽 작은 마을인 볼세나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있던 때의 사건이다.

그 사제는 성체 성혈의 신비를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빵은 빵이고, 포도주는 포도주이지 어떻게 이것이 살과 피가 되겠냐!’는 의심속에 항상 미사를 거행해 왔다.

이날도 이런 생각속에 성체성사 도중 포도주를 들어 올리자 성배에서 피가 흘러넘쳤다.

흘러넘친 피는 제대보를 흥건하게 적셨다고 한다.

그 피 묻은 제대보가 모셔져 있는 성당이 오르비에토 두오모이다.

나는 그곳에 도착하기 전까지 그 성당의 내력을 전혀 알지 못했다.

‘주님은 왜 나를 이 성당으로 인도하셨을까?’

오세브레이로 성모마리아 성당은 그때 무척 당황했었던 기억을 되살아나게 했다.

주님이 나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주님! 저에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성모마리아성당 모습. 9세기에 지어진 성당이란다. 외부 모습을 보면 정말 오래된 성당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오세브레이로를 둘러보면서, 마치 영화 로빈훗에 나왔던 요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민속촌 같은 느낌이다.

내일 먹을 음식을 구입하기 위해 갔던 마을 식료품점도 특이하게 생겼다.

점포로 내려가는 길도 오래된 나무계단을 빙빙 내려가는 형태다.

밧줄을 타고 다니면 좋을 것 같은 마을이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에게는 무서운 곳이었기도 하다. 

저녁이 되자, 프레도와 함께 식사를 하러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 들어가자 최영화씨와 직업이 의사였던 멕시코에서 온 순례자분이 있었다.

4명이서 함께 자리한 후 순례자메뉴를 시켜 함께 나눠 먹었다.

최영화씨는 오늘 여기까지 걸어올라왔단다.

전쟁을 피해 피난 온 사람마냥 꼴이 말이 아니다. 

아무튼 맛있는 저녁을 좋은 사람들과 함께 먹으니 좋았다. 

갈리시아의 첫 마을 ‘오세브레이로’가 남긴 인상은 ‘멋짐’이다.

민속촌 같은 오세브레이로. 이 모양의 건물은 갈리시아 전통가옥으로 파요사라는 이름이다. 파요사는 지붕을 밀짚으로 엮은 돌집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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