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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팬서 Dec 01. 2020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숨통을 조여오는 적막 끝에는 그저 무력한 노인만 남는다.

보고 나면 경이로워지는 영화가 있다. 보는 도중 미칠 듯이 긴장하거나 한없이 감동받긴 하지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 아드레날린이 솟기보다는 경이로워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그런 영화. 가장 최근의 경험은 폴 토마스 앤더슨의 <데어 윌 비 블러드>가 그러했는데, 코엔 형제의 역작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보고도 그런 감정을 느꼈다. 정신을 차리고, 영화를 보면서 끄적인 것을 바탕으로 풀어나가도록 하겠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리뷰다.




영화는 르웰린 모스가 끔찍한 총격전이 벌어진 사건 현장에서 우연히 돈뭉치가 든 가방을 손에 넣지만, 이를 노리는 사이코패스 살인마 안톤 쉬거에게 쫓기고, 또 이들을 추적하는 보안관 벨까지 합세하면서 벌어지는 추격전을 그린다. 희대의 빌런으로 불리는 안톤 쉬거의 엄청난 포스를 볼 수 있을 거란 예상은 했지만 초반부터 그렇게 압도적으로 미친 모습을 보여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오프닝부터 우리를 사로잡더니 내내 긴장감 넘치는 서스펜스를 이끌어낸 코엔 형제의 연출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작품성만 좋은 줄 알았는데, 나름 흥미진진하게 풀어냈다는 점이 정말 좋았다. 코엔 형제 특유의 유머감각도 보이지만 대체적으로 건조한 분위기를 띄며, 굉장히 처절하고 잔인한 추격전으로 이루어져 있어 조금 호불호가 갈릴만한 영화다. 개인적으론 취향이 너무나 잘 맞았던 작품. 

담고 있는 것이 상당히 많으나 한 번의 관람으로 모든 것을 알아낼 수는 없는, 꽤나 어렵고 어찌 보면 불친절한 영화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추악한 젊은 인간들이 살고 있는 이 현대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차릴 수 있다. 시종일관 건조한 사막과 황량한 도심 속에서 두 젊은이들이 목숨을 건 잔인한 추격전을 하는 모습과, 이를 뒤쫓는 늙은 보안관의 모습을 보여주며 잘 전달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제목인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꽤나 독특하다. 욕망으로 가득 찬 이들의 싸움은 결국 추악하게 끝나고, 그 뒤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은퇴한 보안관만 남는다. 노인이 잔인한 사막만이 남은 이 나라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동시에 굉장히 철학적인 메시지도 던진다. 안톤 쉬거는 동전을 던지며 앞면이나 뒷면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 무력한 인간들은 압박감 속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렇게 무력해져간다. 이러한 무력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칼라 진 처럼 질문 자체를 거부해야 한다. 허나 우리가 그렇게 거부할 수 있을까. 이외에도 삶과 죽음, 그리고 돈에 대한 욕망도 날카롭게 비판한다. 계속 파내도 끝이 보이지 않는, 마치 끝없이 깊은 우물 같은 작품이다.

안톤 쉬거를 연기한 하비에르 바르뎀은 그야말로 미쳤다. 나올 때마다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연기력을 선보이는데, 진짜 보면서 무서움을 느낄 정도였다. 그의 시그니처인 동전 던지기를 하거나, 공기총으로 문을 열 때면 마치 내가 사냥감이 된 듯한, 숨통을 조여오는 느낌이 든다. 절제된 무표정이지만, 그가 주는 공포는 엄청나다. 정말 죽음과 불행 그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을 너무나도 잘 표현해낸 듯하다. 르웰린을 연기한 조쉬 브롤린도 아주 뛰어나다. 안톤 쉬거에 당당히 맞서는 범상치 않은 깡을 지닌 르웰린을 잘 표현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는데, 돈에 대한 욕망의 허무한 끝과 죽음은 피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해 주는 중요한 포지션의 인물이다. 토미 리 존스가 연기한 보안관 벨은 어쩌면 이 영화에서 쉬거나 르웰린보다 중요한 역할일지도 모른다. 영화의 전체적인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이 벨이 아닐까 싶다. 자비 따위는 없는 세상에서 무력한 노인을 연기해 엔딩의 여운을 남겨준다. 우디 해럴슨도 보여서 반가웠는데, 생각보다 분량이 적어 놀랐다.

배경 음악이 거의 전무하다 싶을 정도로 적어 거의 적막이 흐르는 수준인데, 오히려 긴장감이 배로 오른다. <그래비티> 이후에 이렇게 적막을 잘 사용하는 영화도 처음이다. 배경 음악이 없는 대신에 바람 소리나 천둥소리, 그리고 총 소리가 더욱 부각되는데, 사운드가 정말 엄청나다. 촬영은 로저 디킨스라는 것을 단박에 알 정도로 지평선을 따라 움직이는 촬영이 돋보이는데, 거장의 촬영인 만큼 압도적이다. 물론 그 해 디킨스 옹이 촬영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엄청난 촬영임은 반박할 수 없을 것 같다.

그야말로 경이로움이 먼저 느껴졌던, 코엔 형제의 걸작이다. 앞으로 코엔 형제의 남은 영화들도 아주 쟁쟁하지만, 이와 같은 감정을 주는 영화가 나올까 하는 의문이 들게 만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다.




총점 - 10
숨통을 조여오는 적막 끝에는 그저 무력한 노인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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