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로맨스의 계절이다. 크리스마스와 발렌타인데이 등의 기념일들이 많은 데다, 날씨는 춥지만 마음은 따뜻해지는 낭만적인, 또는 시리게 아픈 사랑을 그린다는 점에서 로맨스 영화들을 보기에는 겨울이 딱이다. 겨울의 상징이기도 한 눈이 내리는 날이면 생각나는 대표적인 로맨스 영화가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오늘 리뷰할 작품이다. 로맨스 영화를 많이 안 보기도 한데다, 마침 2020년 영화를 볼 기회도 없어서 잠시 동안 로맨스 영화를 몰아서 볼까 한다. 그 첫 주자가 바로 미셸 공드리 감독의 <이터널 선샤인>이다.
영화는 헤어진 연인 클레멘타인이 자신에 대한 기억을 지웠다는 사실에 분노한 조엘은 자신도 리쿠나 사에 찾아가 클레멘타인에 대한 기억을 지우려고 하지만, 기억이 지워지는 도중에 그녀와 함께했던 행복했던 시간들을 보면서 기억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짐 캐리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할 때부터 일반적인 로맨스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물론 예상과 다른 것이었지 초반부는 맘에 들었다. 인연에 대한 낭만을 그리는 데다 겨울 로맨스라는 칭호가 걸맞은 배경까지. 이때까지만 해도 일반적인 로맨스의 달달함, 혹은 연인과의 치열한 갈등 등을 예상하며 기대했지만, 기억을 지우는 장면이 나오고부터 가슴이 턱하고 막혔다. 기억 지우는 과정이 들어가면서부터 카우프만 각본 특유의 난해함과 복잡함이 보였지만, 그래도 먹먹한 감정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기억을 지운다는 참신한 소재도 나름 신선하게 다가왔으며, 사랑과 기억과 추억의 소중함을 부각하는데 아주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종종 나오는 공포나 스릴러물과 같은 연출은 조금 당황스럽고 놀라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감정의 어딘가를 건드리는 그런 영화였다. 이런 영화는 참 오랜만이다.
기억이 얼마나 소중한지는 누구나 다 알고 있다. 하지만 언제나 인지하지 못하고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터널 선샤인>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추억이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하며, 간직할만한 것인지 잘 알려준다. 그리고 그 과정과 결과를 너무 절박하고 먹먹하게 전해준다. 기억이 지워지는 과정을 거슬러 올라가는 구조가 너무나도 탁월하게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사랑했다는 사실과 둘만 가지고 있는 추억. 이것을 대체 어떻게 지울 수 있겠는가. 비록 내가 그렇게 아픈 사랑을 해본 적은 없어서 막 눈물이 흐르기보단 그저 먹먹한 감정만 들었는데, 아마 다들 비슷한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그와 동시에 그렇게 막고 싶어 했던 망각 때문에 이들의 사랑이 다시 시작했다는 점은 아이러니만 하다. 개인적으로 대사들이 하나같이 기억에 남는 영화였다. 별다른 설명을 하기보다 인상 깊었던 대사 두 가지만 적겠다. "망각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자신의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니라", "이런 추억이 곧 사라지게 돼, 어떡하지?/그냥 음미하자".
코미디 장르에서만 부각되었던 짐 캐리의 정극 멜로 연기는 새롭기도 하면서 놀라울 정도였다. 그가 전해주는 추억 속에서 느꼈던 행복감과 함께 기억을 지우고 싶지 않다는 절박함 또한 너무나도 잘 느껴졌다. 그가 기억을 지우는 과정을 멈추기 위해 겪는 여러 가지 과정들도 너무나도 잘 묘사해서 이입이 더욱 잘 되었던 것 같다. 케이트 윈슬렛도 너무 아름다울 뿐 아니라 매력도 엄청나고 연기력도 대단하다. 조엘의 기억 속에서 독특한 매력을 뽐내고, 기억이 지워진 후 다시 조엘과 만나는 과정에서의 감정 연기는 아주 뛰어났다. 조연으로 보였던 매리 역을 맡은 커스틴 던스트의 임팩트도 상당히 뛰어나다. 자신의 진실을 알고 혼란스러워하는 그녀의 연기도 괜찮았다. 마크 러팔로나 일라이저 우드 등 반가운 얼굴들이 보여 영화의 몰입도를 한 층 더 높여준다.
포스터에도 나온, 눈이 쌓인 해변에서 둘이 뒹구는 그 장면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안타까운 장면이었다. 이제는 그 장면을 그리 낭만적으로 생각하지는 못할 거 같은 느낌이다. OST도 너무나 익숙하고 좋았다. 예상했던 것과는 달랐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를 건드렸던, 너무나 와닿았던 영화다. 보고 나서 여운에 잠겨있게 만든 몇 안 되는 영화다.
이러한 사랑을 해보지 못해서 이해하지 못하고 담지 못해 많은 것들이 넘쳐흘렀다. 이미 만점 짜리 작품임에도 더 담아내고 싶다. 사랑이 두려워지기는커녕 이 영화의 많은 부분을 더 담아내고 싶어서라도 사랑을 해보고 싶게 만드는, 그런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