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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팬서 Dec 24. 2020

<안티고네/Antigone>

가족과 윤리 사이에서 신화적 메타포를 곁들여 호소력 짙게.

신화를 현대에 끌고 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과학, 기술 등 여러 분야들의 발달로 신의 존재 자체가 부정되고 있는 가운데, 신화를 기반으로 제작한다면 판타지 블록버스터 같은 장르나 떠올리게 되기 십상이다. 그런데 여기, 그리스 신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아주 뛰어난 영화가 있다. 올해 11월에 개봉해 꽤나 눈길을 끈 영화, <안티고네>가 그 주인공이다.




영화는 캐나다 몬트리올에 정착한 이민자 가족의 막내 안티고네에게 큰 오빠가 총에 맞아 사망하고 작은 오빠가 구속되는 비극이 찾아오자, 안티고네는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오빠 대신 감옥에 들어가고, 대중들은 SNS 영웅으로 만들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굉장히 영리한 영화다. 캐나다 영화는 오랜만인데, 꽤나 신선하게 다가왔다. 신화를 그저 판타지 요소로만 소비한 것이 아니라 인권 문제, 이민자 문제 등의 소재로 아주 잘 엮어낸다. 그리고 경찰의 과잉진압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는데, BLM 운동과 겹쳐 보인다는 점도 나름 흥미롭다. 영화는 따뜻하고 행복한 분위기에서 순식간에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 등 극적인 연출을 통해서도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지만 신파로 빠지지 않고 꼿꼿하게 밀고 나가는 강한 힘을 지니기도 했으며, 잔잔하면서 묵직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최근 영화들에서 언론이나 SNS 등의 소재를 너무 가볍게 사용하는 부분이 아쉬웠는데, <안티고네>는 이러한 부분에서 만족스럽다. 물론 몇몇 부분들의 편집이 널뛰거나 난잡하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SNS와 같은 소재를 아주 잘 다뤄내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은 안티고네이지만, 그 누구도 원망할 수 없다는 점이 영화의 최대 강점인 듯싶다. 가족을 지키고 싶은 굳은 의지와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용기는 아주 훌륭하지만, 이러한 것들로는 현실을 이겨내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점을 알기에 먹먹함이 더해진다. 가족과 윤리, 그리고 법 사이에서 과연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데, 이것이 안티고네라는 신화적 메타포와 맞물려 훌륭한 시너지를 낸다. 신화를 이렇게 잘 재해석한 영화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영화는 연대에 관해서도 많이 다루고 있는데, 구치소에 있는 소녀들부터 그녀의 가족, SNS 유저들, 그리고 언론 등의 연대와 믿을 보여줌으로써 연대를 통해 현재의 사태를 극복해 나갈 수 있다는 일종의 해법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다만 영화가 제시한 연대라는 해법은 좋을 수 있어도 이를 이어나가는 과정에 있어서는 조금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강하게 느껴진다.

영화의 메시지와 연출에 있어서 안티고네라는 캐릭터는 상당히 매력적이다. 굽히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유지하는 담담하고도 강력한 영향력을 극 중 내내 미친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력은 안티고네를 연기한 나에마 리치의 연기력에 힘입어 더욱 빛을 발한다. 나에마 리치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할 때의 호소력, 그리고 절규하듯이 소리칠 때의 흡입력은 정말이지 엄청나다. 안티고네와 그녀를 연기한 나에마 리치의 원맨쇼라고 봐도 무방하다. 다만 안티고네에 너무 힘을 실어주었는지, 주변 캐릭터의 무게감이 조금 떨어진다는 점은 아쉽다. 폴리네이케스를 비롯한 안티고네의 가족들, 그리고 그녀의 연인 하이몬, 그리고 하이몬의 아버지 크리스티앙 모두 그렇게 큰 역할을 해내지 못한다. 전체적으로 안티고네를 위해 캐릭터들이 소비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조연진들의 연기는 나름 훌륭하지만, 캐릭터 활용에 있어서 조금 아쉽게 다가왔다.

<안티고네>는 신화를 현대로 그대로 가져온듯한 자연스러움을 기반으로 안티고네를 연기한 나에마 리치와 함께 극을 끌고 가는 흡입력을 지녔다. 아쉬움도 많이 보이는 작품임에도, 몰입하면서 볼 수 있는 훌륭한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총점 - 7.5
가족과 윤리 사이에서 신화적 메타포를 곁들여 호소력 짙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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