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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팬서 Mar 04. 2021

<미나리/Minari>

온갖 풍파 앞에서도 끈끈하고 꿋꿋하게.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고향에서 벗어나 미국에서 꿈을 이루겠다는 말인데, 그만큼 미국에 이민자들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죠. 괜히 미국을 이민자의 나라라고 하겠습니까(물론 지금은 상황이 달라지긴 했다만). 다만 그 아메리칸 드림이 쉽게 이뤄질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미국으로 이민을 간 사람들 중 성공의 기쁨을 맛본 사람보다 실패의 쓴맛을 겪은 사람들이 훨씬 많거든요. 그런 이민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가 2020년과 21년을 뜨겁게 달궜습니다. 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입니다.




영화는 미국으로 이민 온 한국인 가족인 제이콥, 모니카와 아이들은 제이콥의 농장을 가꾸기 위해 아칸소로 이사를 오고, 아이들을 위해 모니카의 엄마 순자가 같이 살기로 결정했지만 큰 딸 앤과 막내 데이빗은 이런 할머니를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한국인 가족이고 한국적인 정서도 충분하지만, 전체적으로 미국 이민자들을 위한 영화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한국인만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영화가 아니라 국적 상관없이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넘어온 사람들에게 와닿을 영화라는 겁니다. 오히려 우리 같은 한국인들은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영화를 보면서 한국인들만 느낄 수 있는 보편적인 정서를 얻어내기엔 조금 부족하게 느껴질 수도 있어요. 그만큼 <미나리>는 뼛속까지 미국 영화라는 것이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이런 부분을 기대하고 간다면 느껴지는 이질감에 당황하거나 실망하실 수도 있을 거 같아요. 물론 각종 음식과 화투 같은 문화 요소들이 반갑게 느껴지며, 이와 같은 장치들로 분명 한국인들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함이 내재되어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우리만 쓰는 것 같은 말들은 어떻게 번역했을지 궁금하기도 하더라구요.

<미나리>는 매우 잔잔하게 흘러가는 편입니다. 그리고 가족, 특히 조부모님과의 만남을 통해 연대를 추구하는 극의 형태를 보면서 작년에 아주 좋게 봤던 <남매의 여름밤>과 비슷한 구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남매의 여름밤>과는 확실히 다른 지점이 느껴집니다. <남매의 여름밤>도 충분히 잔잔하게 흘러가지만, <미나리>는 그보다 더 나아가 진한 담백함까지 담아내고 있거든요. <미나리>는 이미 수두룩하게 봐왔던 가족의 애환을 통해 눈물샘을 자극하는 장치들은 물론, 이것까지 제거하나 싶을 정도의 과감한 뺄셈을 발휘하는데, 밋밋하게 느껴지기는커녕 오히려 이러한 뺄셈을 통해 극을 수려하게 장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보통 우리가 한국인 이민자라는 단어가 주어졌을 때 쉽게 예상할 수 있는 길을 <미나리>는 걸어가지 않습니다. 인종차별은 물론, 할머니의 죽음과 같은 기시감이 드는 설정들을 빼버리고, 아주 담담하고 담백하게 가족들의 이야기를 체험하게 해주고 있어요. 이 부분이 <미나리>가 가진 많은 장점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점이 아닐까 합니다. 개인적으로 <미나리>라는 제목이 참 와닿네요. 온갖 고난 앞에서도 버텨내고, 아주 끈끈하고 꿋꿋하게 사는 그들의 삶. 비록 우리가 깊이 공감하기는 힘들지만, 미나리 같은 가족애가 지금 미국을 세계 최강국이라는 위치에 올려놓은 많고 많은 요소들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사실 영화가 아무리 좋은 메시지를 가지고 있더라도 정적인 연출은 쉽게 지치거나 지루하게 느껴지기 쉬운데, <미나리>는 이러한 문제를 간단하고도 어려운 방법으로 헤쳐나가고 있습니다. 바로 배우들의 연기력으로 말이죠. 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는 스티븐 연과 한예리의 연기가 참 좋았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스티븐 연과 한예리의 조합을 보곤 기대보단 걱정이 먼저 들었습니다. 부모 역할을 익숙하지 않은 배우들일뿐더러, 무엇보다 스티븐 연의 발음이 조금 걸렸기 때문인데요. 이런 걱정은 사치였습니다. 스티븐 연의 발음은 조금 어색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이것을 제외하면 둘의 연기력은 아주 좋았거든요. 영화의 분위기에 맞춰 정적인 연기를 보여주지만 그 속에서 강한 폭발력을 가진 연기를 선사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극이 안정적으로 잘 흘러가구요. 이 둘의 연기도 훌륭했지만, 조연의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데이빗 역의 앨런 S. 김과 순자 역의 윤여정의 임팩트가 장난 아니었네요. 조금은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극을 윤여정이라는 배우가 노련하게 환기시켜주고, 앨런 S. 김도 나름의 활력소 역할을 톡톡히 해줍니다. 윤여정이 과연 아카데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지 귀추가 주목되네요. 솔직히 아카데미는 설레발이라고 생각했는데, 보고 나니 다르게 느껴집니다. 연륜은 무시할 수가 없네요.

다만 아쉽게 느껴지는 점도 있습니다. 우선 아무래도 정이삭 감독이 미국인이다 보니 번역된 듯한 느낌이 강한 대사는 이질감이 들게 만드네요. 한예리 배우의 대사도 조금 어색하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는 너그러이 봐줄 만한 정도예요. 급하게 마무리되는 듯한 엔딩도 조금 아쉽게 다가옵니다. 나름 잘 풀어냈다지만 지속적인 잔잔함도 조금을 물릴 때도 있구요. 하지만 정말 훌륭한 영화라고 자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살아온 한국인들이 이 영화에 깊이 공감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아마 이 영화의 태생적 문제가 크게 작용하겠죠. 하지만 확실한 건 우리만 느낄 수 있는 부분도 존재한다는 거예요. 이 부분이 <미나리>라는 영화를 가장 흥미롭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들의 모습, 그리고 우리의 모습을 담백하게 담아낸 수작, <미나리>입니다.




★★★★
:온갖 풍파 앞에서도 끈끈하고 꿋꿋하게, 인상적인 뺄셈으로 수려하게 장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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