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와 화합이라는 전언을 감싸는 동양의 멋.
매년 적어도 1편, 많으면 2편 이상 씩 찾아왔던 디즈니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이 작년에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물론 이를 메꿔줄 픽사의 <온워드: 단 하루의 기적>, 블루 스카이의 <스파이 지니어스>, 그리고 정말 훌륭했던 <환상의 마로나>가 있었지만 애니메이션 계의 공룡인 디즈니의 작품이 없으니 허전하긴 하더군요. 시간을 더듬어보니 마지막으로 개봉한 디즈니 장편 애니메이션이 2019년 11월의 <겨울왕국 2>더라구요. 1년이 조금 더 넘어서야 다시 찾아온 작품이 바로 이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입니다.
영화는 인간과 드래곤이 평화롭게 공존하던 쿠만드라에 악의 세력 드룬이 들이닥치고, 드래곤은 인간을 구하기 위해 희생했지만 500년 뒤에 다시 부활한 드룬이 인간 세상을 공포에 빠뜨리자, 라야가 분열된 쿠만드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 전설 속 마지막 드래곤을 찾아 나서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우선 디즈니 영화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기존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밟아온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작품입니다. 디즈니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클리셰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 볼 수 있어요. 디즈니 작품을 어느 정도 본 사람이라면 쉽게 예측할 수 있으며, 나아가 유치하고 진부하게 느껴지지는 지점이 분명히 존재하거든요. 다만 이런 부분들이 단점으로만 작용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많은 분들이 느끼는 것처럼 이런 클리셰에도 나름의 사랑스러움이 담겨있어요. 그래서 굉장히 식상하고 뻔한 영화라는 기시감이 들면서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면 만족스러운 감정을 느끼게 만듭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편인데, 기존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좋게 보셨다면 이 작품도 무난하게 좋아하실 것 같아요. 얼마 전 개봉한 <소울>과도 어쩌다 보니 비교하면서 보게 되었는데, 참 디즈니와 픽사의 색깔이 확실히 다르구나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줬습니다.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아무래도 동남아시아를 배경으로 하는 세계관이 아닐까 싶어요. 지금까지 아시아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뮬란> 뿐이라는게 새삼 놀랍더라구요. 사실 영화는 동남아시아를 배경으로 했다는 것을 대놓고 보여준다고 느껴질 정도로 다양한 장치들을 통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거슬리지 않을까 싶었는데, 뒤로 갈수록 잘 녹아들어서 괜찮았네요. 오히려 동양 특유의 멋들어짐이 심금을 울릴 때가 있는데, 이 부분이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에서 가장 큰 매력으로 다가왔습니다. 특히 드래곤들이 등장할 때는 벅차오를 정도였어요. 영화의 메시지는 용서와 화합인데 나름 잘 전달되긴 합니다만, 이를 전달하기 위한 서사가 너무 엉성하고 얼렁뚱땅 넘어가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가장 큰 단점은 메시지를 1차원적으로 전달해 줌에도 불구하고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은 용서와 화합을 추구하지만, 사과라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빼먹고 있거든요. 덕분에 맹목적으로만 느껴지고 공감이 가지 않네요. 그래도 디즈니답게 기술력은 매우 뛰어나고, 액션신도 나름 훌륭하며, 왕자가 등장하지 않는 등 영화 외적/내적으로도 많이 발전했다는 느낌이 들긴 합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서사의 독창성만 해결된다면 손색없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애니메이션 영화 자체의 완성도는 픽사의 손을 들어주는 편이지만, 영화의 캐릭터성 하나만큼은 디즈니를 따라올 제작사가 있을까 싶습니다. 제가 <겨울왕국>이나 <주토피아>와 같은 서사가 부족한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고평가하는 이유도 각 작품이 가진 캐릭터의 매력이 매우 출중하기 때문이거든요.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도 이와 같은 디즈니의 최대 장점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습니다. 주인공 라야는 어쩌면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충분히 현대적으로 다듬어진 캐릭터입니다. 하지만 그 이상의 매력을 보여주지 못한 점은 아쉽게 느껴지지만 충분히 멋있는 캐릭터라고 생각되네요. 개인적으로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의 정수는 드래곤 시수라는 생각됩니다. 예고편에서부터 심상치 않다 싶었는데, 정말 엄청난 매력을 선사하네요. 일단 외관부터가 완벽한데(엘사용.. 아이라인을 그린 용이라니요), 아콰피나의 훌륭한 목소리 연기가 더해져 여태까지 본 적 없었던 용 캐릭터를 그려냅니다. 역대 디즈니 캐릭터 중에서도 상위권에 놓아주고 싶습니다. 다만 라야와 시수를 제외하면 굳이 존재해야 하나 싶은 캐릭터들이 수두룩합니다. 물론 귀엽고 매력 있는 캐릭터들이지만 서사 진행에 있어서 굳이 필요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거든요. 개인적으로 메인 빌런 위치에 있는 비라나는 좀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녀에게 공감할만한 여지를 남겨줘야 하는데, 이놈의 스토리 때문에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네요.
역시나 음악도 좋았습니다. 다만 뮤지컬 영화는 아니라서 인상적인 주제곡은 없었지만 그래도 좋은 노래들로 가득했어요. 디즈니의 매력은 좋은 넘버들로 꽉 채운 뮤지컬 애니메이션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영화도 좋네요. 디즈니 특유의 클리셰를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안정적인 재미를 이끌어내는 애니메이션,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입니다.
★★★☆
:용서와 화합이라는 전언을 감싸는 동양의 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