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물지 않을 깊은 상처를 안고도 살아가요. 웃기도 울기도 하면서 그렇게.
인생은 만남의 연속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별의 연속이기도 합니다. 연인 간의 이별부터 가족의 죽음까지 수많은 이별이 우리의 삶을 스쳐가는데요. 누군가를 잃은, 상실의 아픔을 겪어도 우리는 사는 것을 멈출 수 없습니다. 계속 살아가야죠. 웃으면서, 때론 울면서, 그렇게 살아가야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연출한 장편 영화 데뷔작인 <환상의 빛>은 갑작스레 찾아온 남편의 죽음을 뒤로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유미코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상실의 아픔이 준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지만, 그럼에도 유미코는 살아갑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잘 먹고, 잘 자고, 또 잘 웃으며 삶을 살아갑니다. 가끔씩 울며 그리워하기도, 또 원망하기도 하지만, 사랑했던 이의 기억을 잊으려, 묻으려 노력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지요. 상처는 아물지 않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무뎌질 테고, 그런 이별의 연속에서 계속 살아가는 것이 삶입니다. 하지만 떠난 이가 남긴 질문들은 계속 남은 사람들의 주위를 맴도네요. 갑작스레 찾아온 죽음으로 남겨진 자들의 모습을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입니다. 이번에 처음 본 감독인데, 상당히 제 취향에 맞는 감독이었는데요. 상실과 이별의 아픔을 겪는 사람의 심리를 이렇게 잘 표현하는 감독은 오랜만인 거 같네요. 여기에 일본 특유의 잔잔한 위로도 더해져 너무 좋게 보았습니다.
대사가 굉장히 적은 영화입니다. 지금까지 봤던 영화들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대사가 적은데, 상실한 자의 심리나 행위를 대사가 아닌 장면으로 보여주는 점이 참 인상 깊었네요. 때문에 상당히 담담하고 먹먹한 분위기가 이어지지만, 절대 눈물로 차있는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물론 촉촉하긴 하지만 관객을 울게 만드는 영화는 아니라는 이야기지요. 이게 자칫하면 지루해질 수 있는데, 보면서 지루하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들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현대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능력일 텐데, 정말 놀라우면서도 부러운 그런 연출력이네요.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하는 심리를 묘사하는 능력도 아주 탁월합니다. 무덤덤해진 듯하면서도 사소한 기억 하나로 다시 무너지는, 절대 아물지 않을 상처를 안고도 살아가는 이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데, 시간이 하는 역할을 아주 잘 풀어냅니다. 결이 다르긴 하지만 약간은 링클레이터 감독이 생각나기도 한달까요. 유미코를 감싸고 있는 질문들. 왜 남편은 갑자기 세상을 등졌을까라는 질문은 아직까지 유효한 것 같습니다. 영화가 끝나고도 계속 생각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네요.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전부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더욱 다가왔을지도 모르겠네요. 이 이야기가 단지 유미코만의, 특수적인 이야기가 아닌 우리 모두의 보편적인 이야기가 아닐까 싶은데, 인물 묘사가 너무 훌륭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개인적으로 일본 영화를 보면서 발연기 같다 싶은 느낌을 한 번씩은 받는데, 이 영화는 분위기상 대사가 별로 없기 때문에 그렇지 않았습니다. 약간 한국 정서에도 잘 맞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정말 좋았습니다. 아무리 거장이라도 첫 작품부터 이렇게 만족하는 경우는 별로 없는데 너무 좋았네요. 너무 취향에 맞는 작품이라서 앞으로의 작품들이 더 기대되게 만드는 영화였습니다.
★★★★
:아물지 않을 깊은 상처를 안고도 살아가요. 웃기도 울기도 하면서 그렇게, 담담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