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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팬서 May 19. 2021

<세 번째 살인/三度目の殺人>

진실도 없이 생명을 저울질하는 참혹한 살인 현장에 보낸 묵직한 시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11번째 장편 영화인 <세 번째 살인>은 기존에 선보였던 가족 영화, 그리고 최근 들어서 보여주었던 친절하고 따뜻한 분위기의 작품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입니다. 굳이 따지자면 초창기 보여주었던, 굉장히 차갑고 냉소적이었던 초기작의 느낌이 나는데, 이마저도 법정 장르를 선택하는 바람에 히로카즈의 새로운 스타일처럼 보이거든요.

이렇듯 영화는 굉장히 차갑고 묵직하게 다가오는 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히로카즈의 이런 분위기를 좋아하는지라 보기 전 꽤나 기대를 했는데, 약간의 신선함과 기존의 무거우면서 잔잔한 분위기는 좋았지만 살짝 아쉬운 점도 눈에 띄더군요. 일단 이런 분위기 자체는 좋지만 히로카즈의 가장 큰 강점은 가족에서 오는 애정과 휴머니즘인데, 주제가 주제인지라 여기선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함정입니다. 기존 히로카즈의 영화를 좋아하신다면 시도할만하지만, 이전에 보여주었던 그 느낌은 나지 않으니 주의하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그래도 참 훌륭하고 영리한 감독이라는 것이 느껴졌는데, 냉철한 통찰이 이제는 가족을 넘어서 일본 사회도 꿰뚫어 낸다는 것이 대단하게 느껴졌네요. 잔잔하지만 아주 힘 있게 끌고 가는 능력은 여전했습니다. 아, 그리고 가끔가다 이 영화를 법정 스릴러로 알고 접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러면 조금 실망하실 거 같네요. 법정 스릴러라기엔 너무 잔잔한 데다 끝까지 모호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터라 시원한 만족감을 느끼기에는 부족할 영화입니다.

영화는 일본의 사법체계에 대한 묵직한 시선과 관객을 향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입니다. 그래서 꽤나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고 어떤 면에서는 해석도 필요한 편인데요. 일단 진실의 존재 여부보다는 승패, 그리고 심판을 중요시하게 여기는 현재 일본 사법체계에 대해 강렬한 시선을 던지고 있습니다. 아무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 법정에서 누가 죄의 무게와 생명을 저울질하나요. 의도에 따라 죄의 무게가 달라질 수 있을까요. 이러한 사법체계가 또 하나의 참혹한 살인 현장이나 다름없다는 일갈을 보내고 있습니다. 또한 관객에게 세 번째 살인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요. 영화 안에서 계속 엎치락뒤치락 하느라고 조금 어렵고 헷갈릴 수 있는데, 개인적인 생각이자 거의 정설로 여겨지는 부조리한 사법 구조에서 오는 살인이라는 것입니다. 진실을 말하는 것보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더 중요한 법정에서 벌어지는 살인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미스미 자신에 대한 살인으로 봐도 될 거 같습니다. 자신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사람으로 여기며, 교묘하게 진술을 바꿔서 사형으로 향하게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이런 질문이 참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아마 히로카즈의 영화 중 카메라의 역할이 가장 돋보였던 영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영화 내내 치밀한 구도를 보여주는데요. 개인적으로 영화 마지막 부분 시게모리와 미스미가 대화하는 장면이 정말 최고였던 것 같습니다. 시게모리가 진실에 접근한 것 같았지만 이를 조롱이라도 하듯 유리에 비친 미시미의 모습과 겹칠 듯 겹치지 않죠. 그리고 이어지는 (밑에 스틸컷과 같은) 장면에서 갈림길 앞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게모리. 이 시퀀스들에서 감탄하느라 대사를 놓칠 정도였습니다. 돌려보기까지 했네요. 배우들도 아주 훌륭한 연기를 해내고 있습니다. 극의 분위기상 절제미가 돋보이는 연기를 보여주는데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도 출연했던 후쿠야마 마사하루가 보여준 시게모리의 연기도 훌륭했지만 개인적으론 미스미를 연기한 야쿠쇼 코지와 사키에를 연기한 히로세 스즈가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야쿠쇼 코지는 정말 소름이 돋을 정도였네요. 

다만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봤던 히로카즈 영화 중에선 아쉬운 편에 속했습니다. 묵직했던 질문은 좋지만 급변하는 진술을 버티지 못해 관객에게 떠넘기는 듯한 느낌도 살짝 들었거든요. 히로카즈의 가족애를 더욱 좋아하기도 하구요. 다만 영화 자체는 훌륭하니, 쫄깃한 법정 스릴러로만 기대하지 않으시면 좋게 보실 수 있는 영화 같습니다.




★★★☆
:진실도 없이 생명을 저울질하는 참혹한 살인 현장에 보낸 묵직한 시선, 그리고 물음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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