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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팬서 Aug 06. 2021

<아이스 스톰/The Ice Storm>

벌어진 틈새로 밀려와 그 얼음을 기어코 깨뜨린 그토록 싸늘한 설한.

이안 감독의 1997년작 <아이스 스톰>입니다. 이안 감독이 미국 배경에 백인들을 내세운 첫 번째 영화인데요. 이 영화의 캐스팅, 지금 보면 가히 놀라운 수준입니다. 보다 보시면 익숙한 얼굴들이 많이 보여서 깜짝깜짝 놀라실 거예요.

아무튼 이 <아이스 스톰>은 이안 감독의 영화들 중에서(심지어 초기작까지 합치더라도) 인지도가 최하위권인 편인데, 정말 훌륭한 영화 중 하나입니다. 영화는 두 가족이 성적 일탈(불륜 등)을 통해 파국으로 치닫는 모습을 보여주는데요. 이전 이안 감독이 가족을 바라보았던 시선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이전 작품들에선 여러 갈등들이 포진해있더라도 따듯한 시선을 유지했었다면, 이 영화는 제목처럼 굉장히 차갑고 냉정하거든요. 그리고 가족 영화임에도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긴장감을 주는 연출도 탁월합니다. 욕망을 여는 아이들과 절제하지 못하는 어른들로 하여금 가족이 얼마나 깨지기 쉬운 존재이며, 쉽게 파멸할 수 있는지를 아주 잘 담안고 있는데요. 마치 샘 맨데스의 데뷔작 <아메리칸 뷰티>와도 비슷한 느낌을 주는데, 재밌는 점은 동양인의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점이죠. 우리 입장으론 꽤나 객관적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더 차갑게 느껴지기도 하구요.

<아이스 스톰>을 제목으로 지은 이유가 뭘까 싶기도 했는데요. 물론 영화 속에 등장하는 기후 현상을 의미하기도 하겠지만, 단단해 보이지만 깨지기 쉬운 얼음과 같은 가족을 의미하기도 하겠구나 싶었네요. 극 중 언급되는 대사처럼 가족은 공허의 시작일 지도 모르죠. 가까이 갈수록 그 공허함은 줄어들기는커녕 더욱 커져가고요. 그러면서 가족은 어쩔 수 없이 금이 가게 될 텐데, 개인주의가 조금 더 익숙한 서양에선 그 강도가 강할 겁니다. 그걸 아주 잘 짚어내고 있네요. 또 흥미로운 부분은 70년대 당시의 미국 역사와 문화 등을 아주 잘 활용하고 있다는 부분이었어요. 당시 미국 중산층은 어느 때보다 풍요로웠지만 베트남 전쟁이나 워터게이트 사건 등 나라 안팎으로 시끌시끌했죠. 그러면서 우울한 분위기가 있었는데 그걸 잘 묘사하고 있구요. 극 중 폴이 <판타스틱 4> 만화책을 읽는 부분이 있는데, '판타스틱 4'라는 팀이 영화에 나오는 가족과 비슷한 부분들이 많이 보이기도 했네요.

영화를 보다 보면 정말 익숙한 배우들이 많이 나오는데요. 당대에도 이미 스타였던 시고니 위버나 케빈 클라인 등을 비롯해서 앞으로 대성할 배우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당장 '판타스틱 4'를 읽던 토비 맥과이어부터 시작해서, 크리스티나 리치, 일라이저 우드와 케이티 홈즈까지 보면 알 배우들이 많습니다. 개인적으로 크리스티나 리치가 분한 웬디 후드라는 캐릭터가 중요하다고 생각이 드는데요. 영화에 나오는 10대 캐릭터를 대변한다는 느낌이 들었구요. 이를 잘 표현한 크리스티나 리치의 연기가 일품이죠. 우디 앨런의 <애니씽 엘스>에서도 참 인상적이었는데, 연기나 미모나 참 대단했습니다. 지금이야 가족의 깊숙한 환부를 비추는 형식의 영화들이 많지만 97년 당시를 생각해 보면 센세이셔널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이안 감독이 가족 영화를 이렇게까지 차갑게 그려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의외이면서 감탄스럽네요. 감추지 않고 망가지는 모습을 아주 제대로 담아내는데, 스펙터클한 무언가를 기대한다면 그렇게 만족하실 영화는 아닐 거 같아요. 애초에 어디에 포커스를 두냐에 따라 달라질 거 같은데, 저는 아주 만족이었습니다. ^^




★★★★☆
:벌어진 틈새로 밀려와 그 얼음을 기어코 깨뜨린 그토록 싸늘한 설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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