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팬서 Aug 09. 2021

<그린 나이트/The Green Knight>

이토록 고결한 생(生)과 장(長)의 시퀀스들.

경이롭습니다. 이런 영화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거 같아요. 큰 이변이 없지 않는 한 <그린 나이트>는 제게 있어 올해의 영화로 남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이 영화는 <반지의 제왕>같은 대작 판타지 액션 어드벤처가 아닙니다. 유의하셔야겠어요.

많이들 아시다시피 이 영화는 중세 전설 <가웨인 경과 녹색 기사>를 모티프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기본적인 원작의 내용을 알고 가시는 게 당연히 좋습니다. 원작 <가웨인 경과 녹색 기사>는 간단하게 보자면 크리스마스에 녹색 기사의 목을 벤 가웨인이 1년 뒤 똑같이 목을 벤다는 그의 예고에 따라 녹색 교회로 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끝내 죽음에 대한 공포를 뿌리치지 못했는데, 사실 이건 기사들을 시험하기 위해 꾸며진 것이었죠. 명예보다 목숨을 더 원했던 모습은 굉장히 현대적이기도 합니다. 영화는 이것보다 더욱 깊이 들어가면서 중세 기사가 가진 명예에 대한 낭만을 완전히 해체하려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렇기에 원작과는 꽤나 다른 양상이었는데요. 색다른 재해석을 통해 영화 끝까지 몰입하고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게 하는 연출이 아주 탁월했네요.

일단 기본적인 스토리라인과 전개 과정은 비슷합니다. 오직 명예를 위해 그 결과를 알면서도 녹색 기사의 목을 베었고, 그 이후 죽음에 대한 공포가 가웨인을 휘감죠. 이 가웨인의 심리 변화가 원작보다 더욱 강하게 나타나고 있고, 이는 내내 영화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가웨인은 약속을 지키고 온갖 고난과 역경을 헤쳐나가는데요. 그러면서도 죽음에 대한 공포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있고, 기사도의 덕목도 보이지 않죠. 이 부분까지는 원작의 내용을 충실히, 그리고 극대화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의 결말에 다다라 <그린 나이트>는 원작과 완전히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는데요. 바로 가웨인의 (벨트를 풂으로써 이루어진) 성장이겠죠. 결국 <그린 나이트>는 생명과 성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운명을 알고도 나아간 가웨인의 여정은 우리의 인생과 굉장히 닮아있습니다. 그 끝을 알면서도 나아가는 건 굉장히 거룩하죠. 그러면서 그 끝을 어차피 알기에,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벨트를 벗어던지는 가웨인과, 그 이전에 스쳐 지나가는 회상은 정말 환상적입니다. 안 그래도 시대를 앞섰던 메시지를 더욱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최고의 장면이었어요.

영화를 관통하는 생(生)과 장(長)을 정말 매혹적이고 경탄스럽게 장식한 시퀀스들은 가히 경이로운 수준입니다. 지극히 판타지스러우면서도 그 당시 시대를 고스란히 재현한듯한 촬영과 미장센은 말할 것도 없고요. 이렇게 고혹적인 장면들 중심에서 가웨인 그 자체가 된 데브 파텔의 연기는 아주 탁월합니다. 1인 2역으로 이 데브 파텔에게 훌륭히 조응한 알리시아 비칸데르도 인상적이었네요. 오직 가웨인에게 집중하기 위해 꽤나 유명한 인물인 아서왕과, 엑스칼리버로 추정되는 검의 이름을 조명하지 않은 점도 아주 탁월하다고 생각됩니다. 정말 아쉬움이 남지 않은 영화였네요.

약간 난해하고 지루하기도 하다 해서 걱정했더니만, 정말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던 걸작이었습니다. 물론 판타지 블록버스터를 기대하신 분이라면 좋게 보실리는 만무하지만요. 그래도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최대한 큰 관에서 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




★★★★★
:그 끝을 알고도 나아간 여정의 거룩함, 이토록 고결한 생(生)과 장(長)의 시퀀스들.


매거진의 이전글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