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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팬서 Aug 29. 2021

<자마/Zama>

지금껏 본 적 없는, 이렇게나 생경한 지옥의 풍경.

2017년 제작된 루크레시아 마르텔 감독의 장편 영화 <자마>는 실로 기묘한 영화입니다. 스페인의 남미 식민지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몽환적인 분위기에 과감한 생략을 곁들여 전해주며, 아주 기이한 장력이 영화를 장악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네요. 영화의 난이도는 꽤 있는 편이었습니다. 약간 지루하기도 했고요.

일단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드는 느낌은 '참 생경하다'입니다. 영화는 내내 익숙한 배경으로 지금껏 본 적 없는 일련의 사건들로 벗어날 수 없는 지옥의 풍경을 생경하고도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간단하게만 보자면 백인 남성의 실패와 몰락을 통해 탈식민주의를 표방하는 영화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권위적인 관료를 내내 옹졸하고 심지어는 우스꽝스럽게 표현하며 식민주의의 당위성과 감수성을 조롱하듯 해체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거든요. 그리고 침략자인 자마조차 철저히 실패하고 무너지는 모습을 통해 식민 지배의 끔찍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게 오히려 피식민자의 시선에서 그린 것보다 인상 깊게 다가오는 거 같았어요. 그리고 그 끝에는 이러했던 삶의 필요성을 비웃듯이 질문하는데, 전 이것이 우리 현대인들을 향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네요. 어쨌든 반복되어선 안되는 역사들이니까요. 식민 지배의 영향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기도 하고요.

그러나 <자마>가 보여주는 기이한 장력을 보았을 때, 이 영화를 단순히 탈식민주의를 그리는 정치적인 영화로만 한정 짓기에는 아쉽고 어색하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자마>는 이제껏 영화가 보여주지 않았던 영역으로 성큼 나아가고 있거든요. 이 영화가 내내 보여주는 이미지는 18세기의 남미의 역사적 배경을 그대로 재현했다기보단, 몽환적이고 환각적인 분위기로 재창조해낸 공간이라고 볼 수도 있을 거 같은데요. 더 나아가 영화는 인물이 입을 움직이지 않음에도 목소리가 들려오고, 연관성이 없는 사건들을 나열하고, 사건과 사건 사이를 뛰어넘기도 하죠. 불규칙하고, 무질서하며, 하나에 집중되지 않는 이야기들은 영화가 담아낼 수 있는 표현력의 한계를 실험하는 듯하기도 했어요. 감독 루크레시아 마르텔은 <자마>의 배경이 '이미 파괴되어 여전히 망상 속에 사로잡힌 세계'라고 했는데, 그 세계를 실험적이고도 탁월하게 시각화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헛된 희망과 망상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그것들을 끝내 짓밟고 비웃듯이 되묻는 연출은 실로 훌륭하게 느껴지네요.

다만 이 영화, 적응하기가 매우 매우 쉽지 않습니다. 지나치게 폐쇄되고 어두운, 한정된 공간에 오래 머무는 초반부는 정말 지루하게 다가오기도 하거든요. 지나치게 상징적이기도 하고, 꽤나 난해하게 다가오기도 하며, 이야기의 연속성이 많이 떨어지거든요. 그러나 그 지루하게 쌓아두는 실패의 연속들을 참아내기만 한다면, 후반부에 쏟아지는 강렬한 영화적 체험은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희망을 품고, 끝까지 무엇을 해보려 노력까지 하지만 그가 마주한 건 실패와 몰락뿐이죠. 결국 고통받고 죽음에 가까워진 상태가 되었구요. 초반에 자마가 칼을 차고 해변에 당당히 서있던 오프닝과 사지가 잘려나간 채로 배 위에 탈진해 누워있으면서 마주하는 엔딩은 꽤나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좋은 영화였습니다. 초반엔 너무 지루하고 졸리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정말로 기묘한 체험을 했습니다. 이왕이면 컨디션 좋을 때 에너지 보충도 하시고 초반부도 놓치지 않은 채 보셨으면 하는 바람이네요. ^^




★★★★
:지금껏 본 적 없는, 이렇게나 생경한 지옥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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