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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팀덕 Dec 25. 2018

21살, 공황장애 -(7)

캘리포니아 로드트립, 귀국

나는 미국에 간다는 사실에 굉장히 들떠 있었다. 그 기간만큼은, 공황장애와 입시, 스트레스와 불안들로부터 벗어나, 미국 여행에 간다는 하루하루가 기다리고, 설레었다. 무엇보다, 가장 신났던 것 이번 여행의 모든 과정이 로드 트립이 될 거라는 점이었다. 친구에게 차가 있어, 여행 동안 친구의 차를 가지고 이동하기로 했다. 오랜 소원이었던 로드트립을 해볼 수 있다는 점이 상당히 신났었다.


인천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해, 친구와 만나 친구 집으로 향했다. 

다음 날부터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하기로 하고 잠들었다.


샌프란시스코는 미국 사람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도시라고 했던데, 왜 그렇게 얘기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한 여름에도 적당히 시원한 날씨, 항상 맑은 하늘과, 여유 넘치는 분위기. 아마 그런 분위기를 나로서는 상당히 오랜만에 느껴봤던 것 같다. 


사람들도 상당히 친절했다. 지나갈 때 눈이 마주치면 살짝 미소를 지어 보내고, 여행객인 우리에게 선뜻 다가와 어디에서 왔냐며 인사를 건네는 사람도 다수 있었다. 영어 회화 공부를 꾸준히 해왔던 터라, 비교적 원어민들과 소통도 원활해서, 현지인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것도 즐거웠다.


LA로 건너오니, 샌프란시스코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받았다. 샌프란시스코가 느리고, 여유롭고, 잔잔한 느낌을 가지고 있다면, LA는 좀 더 빠르고, 활기차고, 젊고 힙한 느낌을 많이 받았다. 흔히들 얘기하는 미국에서 가장 큰 대도시를 뉴욕과 LA라고 하는데, 내가 지금 그 LA에 와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LA에서는 또 하나 내가 기대하고 있던 것이 있었는데, 한동안 보지 못했던 둘째 이모와 사촌 형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우리 외가 친척들은 미국으로 내가 어렸을 때 이민을 가셨다. 다들 미국에 계시기 때문에, 자주 보지 못한다. 특히, 둘째 이모와 사촌 형은 나에게 너무나 잘해주셔서, 내가 항상 보고 싶어 했다.


지난번 한국에 오셨을 때는, 내가 고3일 때라, 많이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어서 아쉬웠는데, 이번에나마, 오랜만에 좋아하는 친척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났었다. 


LA 에서부터는, 이모와 사촌 형과 동행하며, 여행을 다녔다. 이모와 사촌 형이 친구들에게도 되게 잘해주셨다. 친구들도 이모와 사촌 형을 좋아했다.


이모와 사촌 형은 내 소식을 엄마에게 미리 들으신 것 같았다. 아마 엄마가 미국에서 공황이 왔을 경우에, 대처를 위해 말해놓으신 것 같다.


"유덕아, 한국 많이 힘들지? 그냥 미국으로 와서 이모 집에서 지내며 공부해. 여기는 한국처럼 스트레스받아가면서 공부할 필요 없어. 너도 와서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미국 경제가 많이 힘들어졌다고는 하지만, 미국은 미국이야. 아직 기회가 넘치고, 공부 못해도 할 수 있는 게 차고 넘친단다. 잘하면 좋은 거고."


이모는 같이 다니는 동안, 내게 유학을 계속 권하셨다. 그냥 미국에 와서 지내라는 것. 힘들게 한국에서 아등바등 살 필요가 없이, 미국에 오면, 가족도 있겠다, 영어도 좀 하겠다, 너에게 최고의 조건이라는 얘기셨다.

솔깃하기도 했지만, 그 당시에는 그냥 유학이란 길도 있다는 것을 인지한 정도였다.


대도시 LA를 체험하고 나서, 향락의 도시인 라스베가스에 도착했다. 이모는 라스베가스에 사셔서, 우리는 라스베가스에 머무는 동안, 이모집에 머물기로 했다. 라스베가스 관광을 한 후, 하루는 우리 가족끼리 편을 먹고, 친구들끼리 편을 먹어 3대3 볼링으로 맥주 내기를 한 날이었다. 


친구들이 그 날따라 컨디션이 좋았다. 우리 가족팀이 처참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다들 집에 돌아와 다 같이 맥주를 마셨다.  나와 사촌 형, 친구 한 명이 끝까지 남아 남은 맥주를 전부 비우며,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그러다 보니, 내 근황 얘기가 나오고 사촌 형도 조심스레 얘기를 꺼냈다. 


"유덕아, 형이 네가 그렇게 힘든 줄 몰랐네. 형은 미국 사람이라서 한국에 대해 잘 이해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네가 그렇게 스트레스받으면서 힘들게 사는 줄은 몰랐네. 엄마가 말한 것처럼 그냥 미국에 와. 너 여기서 되게 행복해 보여. 형이 한국 갔을 때랑 표정이 정말 달라."


영욱이도 이 말에 동조했다. 나에게 미국이 더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그래..? 라는 말을 그냥 얼버무리며 진지하게 생각은 안 했던 것 같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벌써 새벽 5시가 되어서야 각자 자러 들어갔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행복했던 여행을 마치고,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나는 몰랐는데, 친구들과 친척들 말에 의하면 내 입이 귀에 걸려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신나 하는 모습을 본 게 오랜만이라면서.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밥 먹다가 엄마가 나에게 말을 하셨다.


엄마는 나에게 유학 얘기를 꺼내셨다. 한국에서 정 힘들면, 외국에 나가서 공부하라는 것이었다. 내가 미국에 나가신 동안, 유학에 대해 조사를 좀 하셨던 것 같다. 나는 그 당시에 대학 진학에 대한 의지도 크게 없었고, 집안에 경제적으로 큰 부담을 주게 될 수도 있는 유학은 전혀 고려하기 싫었다. 


"알겠어요. 한번 생각해볼게요." 라고 대충 대답하며 넘어갔다.


귀국한 뒤, 나는 다시 알바를 시작했다. 친구가 하던 캐셔 알바를 내가 이어받아서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다니던 영어 학원에서도 알바를 시작했다. 미국에 다녀온 뒤, 다시 시간이 남아돌아 시작한 알바였다. 미국 가기 전에는 치료에 집중했고, 미국 여행을 바라보며 지내왔는데, 갔다 오니 다시 무얼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여행을 갔다 오고 공황장애가 눈에 띄게 호전되었다. 공황 증세는 일주일에 한 번 나타날까 말까 였으며, 더 이상 약을 먹을 필요도 없었다. 주치의 선생님은 나에게 상비약만 주시면서, 이제 약을 끊어보자고 했다. 금방 극복한 것 같다고, 다행이라고 지금처럼만 하면 상태가 더 좋아질 것이라고 하셨다.


낮에는 그렇게 식당에서 캐셔 알바를 하고, 밤에는 학원에 가서 알바를 했다. 틈틈이 헬스장도 꾸준히 갔으며, 나름 하루를 바쁘게 만들어 보려고 노력했다. 불안을 떨쳐내 보려고. 주변 사람들은 끊임없이 나에게 정말로 대학을 안 갈 거냐고 질문했다. 


나는 아직은 생각이 없다며, 이번 연도는 그냥 푹 쉬고 싶다며 내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했어도 목표 의식이 없어진 나는 다시 방황을 했다. 알바를 하고 있었지만, 뭐라도 더 해야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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