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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팀덕 Dec 27. 2018

21살, 공황장애 -(9)

또 다른 인생 배움터

만족스러운 9,10월을 보내고 있던 나에게, 하와이에 살고 있는 사촌 형한테 전화가 왔다.


"유덕쓰~ 잘 지내나??"


 그냥저냥 지낸다고 했다. 형이 시간 남으면 하와이에 놀러 오라고 했다. 지난번에 라스베가스 갔을 때는 형도 라스베가스 지리를 잘 몰라서, 제대로 된 구경을 못 시켜준 것 같아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생각해보겠다고 하고, 꼭 갈 수 있도록 해보겠다고 하고 형과의 전화를 끊었다.


하와이에 한번 가보고 싶었긴 했다. 하긴, 누가 하와이에 가기 싫겠는가. 지상 낙원이라는 그곳에는 누구나 가보고 싶을 것이다.


"혹시 하와이 가보고 싶은 사람 없냐?"


나는 동네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얘기를 꺼냈다. 다들 가보고 싶다고는 했지만, 정말 진지하게 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들 확답을 못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친구 한 명이 갈 수 있다고 했다. 자기도 하와이에 꼭 가보고 싶었다며, 나보고 같이 가자고 했다.


여름 동안 알바를 해서 모아뒀던 돈으로 비행기 표를 먼저 사기로 했다. 생각보다 비행기 표 가격이 저렴했다. 왕복 60만 원 정도였다. 미국에서 크리스마스와 신년을 한번 보내보자며 출발을 크리스마스 당일로 해서 신년을 하와이에서 보내고 오기로 했다.


그 이후, 나는 다시 알바를 해야 했다. 하와이에 가서 쓸 경비가 필요했다. 대략 100만 원 정도를 모아야 했다. 그러나 알바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 머릿속으로, 3월에 주유소 사장님의 알바 필요하면 연락하라는 말씀이 기억났다. 나는 바로 사장님께 전화했다.


"사장님.. 저 유덕인데요, 잘 지내시죠? 저 알바하고 싶어서 연락드렸어요."

"어 그래. 이따가 잠시 한번 들러서 스케줄 맞춰보자."


나는 주유소에 들러, 사장님과 스케줄을 맞추고, 다시 주유소 알바를 하기로 했다.

다음날, 출근을 하니, 기존에 나를 알고 계시던 삼촌들이 나를 반겨주셨다.


"여어~ 유덕이 컴백하는 거야?"

"유덕이가 돌아오니까 벌써 주유소에 활기가 넘치는구먼! 20대의 에너지 덕분에!"


"하하하하... 감사합니다. 열심히 할게요."


오랜만에 한 주유소 알바는 힘들었다. 그날도 쉴 새 없이 차를 닦았다. 알바가 끝나고, 집에 돌아와 힘든 몸을 침대에 눕히니, 갑자기 불안감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3월의 그 날이 다시 떠올랐던 것일까. 다시 숨을 잘 쉴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즈음엔, 내가 바닥에 침을 질질 흘리며, 숨을 잘 쉬지 못하는 상태의 나를 엄마가 발견하시고, 괜찮냐며 물어보고 계셨다. 아빠가 나를 부축해 일으켜 세우시곤, 괜찮냐며 무슨 일 있었냐고 물어보셨다. 나는 모르겠다고, 잘 기억이 안 난다. 그냥 갑자기 숨을 잘 쉴 수 없었다고 대답했다. 


그 후, 11월 동안, 꽤나 많은 발작을 집에 와 겪었다. 특히 가장 심리적으로 불안했다고 느끼던 날은 바로 2017 수능 전 날이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수능이 다가올수록, 점점 내 상태가 불안정하다고 느꼈다.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아, 이제 수능은 진짜 못 보겠구나..'


수능에 대한 거부감이 무의식적으로 남아있던 것일까, 11월 한동안 다시 공황 증세가 심해져 좀 힘들었다. 다행이었던 점은, 내가 약에 의지하지 않고, 그 기간을 잘 버텨냈다는 것. 조금만 참으면, 하와이로 떠날 예정이었으니, 하와이로 떠나면, 다시 7월에 미국에 갔다 와서 많은걸 잊고 왔던 만큼, 어쩌면 수능에 대한 것도 전부 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알바를 할수록 몸이 힘들어, 잡생각을 떨쳐내고 그냥 쉴 수 있었다. 그냥 집에 돌아와 쉬고, 운동을 갔다가 저녁엔 동네 친구들을 만나 피시방에 가거나, 맥주를 먹으면, 이래저래 집에서 혼자 잡생각을 할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주유소 알바를 할 때는 새로운 삼촌들이 몇 분 오셨었다. 재밌는 점은, 다들 각자의 안타까운 사연을 많이 가진 분들이었다는 것. 20대 중반 아들의 학비를 벌기 위해 오셨던 삼촌부터, 성공한 사업가였지만, 사업이 부도나는 바람에, 지금 러시아에 유학 가있는 딸의 학비와 생활비를 위해서 일을 하시는 삼촌, 아버지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지만, 그걸 잘 관리하지 못해 전부 잃고, 지금은 아내 몰래 상경해서 투잡을 뛰며 일을 하시는 삼촌까지.


티비나 인터넷에 나올법한 스토리의 사연을 가진 분들을 주유소에서도 많이 만났다. 하루는, 알바가 끝나고 주유소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식당 이모와, 주임님이 대화를 하고 계셨다.


"아휴... 이 주유소에는 사연 없는 사람이 없어. 전부 다 안타까운 사연들이 하나씩은 다 있는 것 같혀."

"그러게요. 유독 여기에 그런 사람이 많네. 이모, 나 국 좀 더 줘요."

"학생은 사연 없어??"

"이모 젊은 친구가 무슨 사연이 있겠어요. 돌도 씹어먹을 나이인데. 허허."


"하하핳.."


그냥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 그룹 상담을 다니며 받았던 충격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주유소에서는 사회의 어두운 면을 좀 많이 봤던 것 같다. 이런 곳에서 일한다며, 은근히 삼촌들을 멸시하는 손님들도 봤으며, 특히 차가 없는 시간에 삼촌들의 안타까운 사연들을 들을 때면,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유덕아, 너는 나를 반면교사 삼아서 이렇게 되지 말어라. 아직 창창하잖냐!"

"삼촌 어때서요. 열심히 사시고, 제 눈엔 유쾌하시고 멋지신데요."


  재밌는 점은, 많은 분들이 우리 부모님과 나이가 비슷하거나, 훨씬 많으신 분들이었는데도, 20대인 내가 해도 육체적으로 힘든 일을 유쾌하게 잘 해내신다는 점이었다. 하루는, 내가 너무 궁금해 삼촌 중 한 분에게 힘드시지 않냐고 질문했다.


"삼촌, 힘드시지 않으세요? 제가 해도 힘든데."

"힘들지. 근데 뭐 별 수 있겠냐 씨X. 인생 그냥 사는 거지 뭐. 이따 일 끝나고 방에 가서 술 몇 잔 하면 또 다 잊혀. 너도 술 먹고 싶으면 얘기해. 내 방에 막걸리 졸라 많아."


그냥 지나가듯이 하셨던 말씀일 수도 있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꽤나 충격적이면서도 멋진 말이었다. 여기 계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힘든 상황 속에서 삶의 무게를 견디며 사시는 분들인데, 잡생각이나 고민 따위는 하나도 걱정하지 않는 마이웨이 정신.


그런 삼촌들에게 많이 보고 배웠다. 어떨 때는 철없게 보이고, 진지하지 못하고, 입은 거칠었지만, 그들의 삶의 경험에서 나오는 관록은 내가 보고 배울 점이 상당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다 보니, 하와이에 갈 날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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