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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팀덕 Dec 29. 2018

22살, 유학 -(3)

다시 심해진 공황장애

나는 토플 시험을 보고, 인터넷을 뒤져 다시 미국 대학 입학에 대한 정보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또한, 이곳저곳에 있는 유학원에 다니며, 내가 지원할 수 있는 미국 대학들을 알아보았다. 조사한 결과, 내가 현재 고려할 수 있는 방향은 세 가지임을 깨달았다. 


첫 번째는, 내 토플 성적과 고등학교 내신 성적을 가지고, 미국 대학에 지원하는 것.

몇몇 대학에서 국제 학생들에게는 SAT(미국 대학 입학시험)을 요구하지 않고, 토플 성적과 내신 성적으로 지원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하지만, 이 방법으로 지원하려면, 내신이 월등히 좋아야 했다. 내 내신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두 번째는, SAT를 응시하고, 토플과 SAT를 가지고, 미국 대학에 지원하는 것. SAT를 보기 위해선, SAT 학원에 등록하고, 공부를 하며 하반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SAT 학원을 찾아보았다. 학원비를 보자 입이 떡 벌어졌다.


"아니, 뭐 이리 비싸냐..?" 


재수 학원 등록금보다도 월등히 높은 가격이었다. 학원비를 보고 바로 이건 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유학에 많은 돈이 들어가는데, 이 돈을 내고 좋은 성적을 받아 좋은 학교에 들어가 비싼 등록금을 내고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라는 생각을 했다. 또한, 남은 4달 동안 준비를 해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마지막 방법은, 미국의 2년제 대학인 커뮤니티 컬리지에 진학해, 거기서 편입을 하는 방법이었다. 인터넷에서 이 방법에 대한 많은 얘기가 오고 갔다. 각종 커뮤니티에서 이 곳에 진학해 편입하는 학생들은 대부분이 한국에서 실패하고 미국으로 도피유학을 와, 학벌 세탁을 하는 학생들이라고 무시했다. 이 방법으로 유학 온 사람들에 대한 비방, 욕설이 넘쳐났다.


"흠... 딱 내 얘긴데?"


학벌 세탁은 모르겠지만, 한국에서의 입시에서 실패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는 사람. 딱 지금 내 상황이었다.

난 처음에 이 방법으로 가는 게 싫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졌다. 사람들이 나의 배경을 멋대로 판단할까 두려웠다. 


진학할 수 있을만한 방법들을 조사하고, 고민에 빠졌다. 지금 내게 쓸 수 있는 카드는 91점의 토플 점수와, 중간 정도의 성적을 가진 고등학교 내신이었다. 이마저도, 미국식으로 내신을 환산하게 되면 형편없는 내신이 되었다.  결국, 나에게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커뮤니티 컬리지로 진학을 하고 편입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몇 번의 조사를 걸친 후, 부모님에게 말씀을 드렸다. 내가 조사한 진학 방법들은 이러이러하며, 현실적으로 내게 맞는 진학 방법은 커뮤니티 컬리지로 진학해 편입을 하는 방법이라고 말씀드렸다. 아빠는 커뮤니티 컬리지를 통한 편입을 반대하셨다. 기왕 갈 거면, 미국 대학 입학시험을 치르고 가라고 하셨다. 그리고 부모님은 SAT가 볼 자신이 없으면, 다시 수능을 준비하라고 하셨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도전해보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대책이 생각나질 않았다. 유학을 가자니, 내게 가장 현실적으로 맞는 방법은 아빠의 반대에 부딪히고, 수능을 보자니, 계속 거부반응이 일어나, 건강이 악화되고, 대학을 진학하지 않자니, 또 오랜 시간 목표를 잃고 방황할게 뻔했다. 공익을 가서 병역 문제를 해결하자니, 적체가 심해 갈 수도 없었다. 


다시 길을 잃고 방황하기 시작했다. 목표를 잃은 나는, 지속적으로 패배감, 좌절감을 느꼈다. 결국,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나는, 공황 증세가 다시 심해지기 시작했다. 현실을 마주할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고, 밤에는 다시 잠을 자지 못하기 시작했다. 내가 비싼 돈 내고, 도피 유학생이라는 꼬리표까지 붙으며 유학을 가야 하는가, 내가 유학을 갈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와 같은 생각이 내 머릿속에서 계속 나를 괴롭혔다.


다시 술을 자주 마시기 시작했다. 거의 매일 밤 나가서 술을 먹었다. 술을 먹지 않으면, 잠에 들 수가 없었다. 

술을 먹지 않는 날에는 밤새 온갖 잡생각과 고민에 빠져 새벽 5시가 돼야 잠에 들곤 했다. 


공황발작을 일으키는 일도 잦아졌다. 약을 먹지도 않았으며, 상담도 다니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많이 호전되었지만, 다시 찾아온 공황에 대처할 길이 없었다. 우울감과 무력감에 빠져 하루하루를 보내곤 했다. 정말 무서웠던 것은, 이렇게 우울감과 무력감에 지속적으로 빠져 지내다 보니, 삶에 의지가 없어진다는 점이었다.


자꾸 나쁜 생각이 들었다. 그냥 없어져버리는 게 어떨까, 그냥 죽어버리는 게 어떨까. 


이런 상태로 거의 한 달을 보냈다. 주변에 내가 이런 상태라는 걸 말하지 않았다. 가족들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내가 이런 상태임을 밝히지 않았다. 혼자 참을 뿐이었다. 점점 내가 망가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뭘 해보려고 하면 뭐가 이리도 걸리는 게 많고 무서운 게 많은지, 과거에 잡혀 사는 스스로를 한심하다 탓하기도 하고, 주변 탓을 하기도 했다. 그래 봤자 손해 보는 건 나였다. 더욱 우울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재밌는 점은, 이렇게 혼자 힘들어하다가도, 사람들을 만날 때면 또 멀쩡한 척, 이제는 괜찮은 척했다는 점이다.  가면을 쓰고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 나에게 힘든 일이 있냐고 물어도 그냥 힘든 일이 있는데, 괜찮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집에 돌아와 가면을 벗고, 다시 혼자 생각에 빠져 힘들어하곤 했다.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점점 없어졌다. 그냥 우울감과 무력감에 나를 던져버린 것 같았다.


집에서는 최근 들어, 자주 일으키지 않던 발작을 자주 일으키자, 부모님은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셨음을 직감하셨다. 하루는 아빠가 나에게 얘기를 좀 하자며 나를 소파에 앉히셨다.


"요즘 어떻게 돼가고 있는 거니? 그 이후로 너한테서 어떻게 할지 듣질 못했네."

"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해야 될지.."

"무슨 소리야?"


나는 그제야 솔직하게 아버지한테 내가 요새 어떤 상태에 있고, 어떤 생각을 하며 지내는지 말씀드렸다. 

아빠는 조용히 내 말이 끝날 때까지 듣고만 계셨다. 그리고 내 말이 끝나자 입을 여셨다.


"그래. 솔직하게 말해줘서 좋다 유덕아. 일단 네가 그런 상태라면, 다시 치료를 받자. 아빠는 네가 많이 호전된 줄 알았는데, 다시 그렇다면 치료가 우선이야. 상담 선생님이랑은 연락해봤니?"

"그래 유덕아. 아빠 말씀대로 월요일에 다시 정신과에 가 봐."


부모님은 나에게 다시 치료를 권하셨다. 나는 약 먹는 건 싫고, 다시 상담소에 다니겠다고 했다. 부모님도 알겠다고 하셨다.


그 후, 나는 다시 상담소에 다니며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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