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치 못한 이별
30분 동안은 머리가 멍했다. 이게 정말인가? 너무나 갑작스러운 소식에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엄마의 모습에 조금씩 적응이 되고, 나도 점차 한국에서의 생활에 다시 적응하기 시작했다. 엄마도 이제 혼자 운전해서 병원에 가실 만큼 많이 나아지셨었다. 가족과도 많은 시간을 보냈다. 부모님이 가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간다고 했고, 집에서도 많은 시간을 보냈다.
6월은 꽤나 바쁘게, 빠르게 지나갔다. 심심한 미국의 생활에 너무 적응이 되어있던 탓인지, 처음에는 적응하기가 많이 힘들었다. 너무나 바삐 돌아가는 서울의 삶에, 한편으로는 나는 역시 도시 사람이라서 그런지 이런 바쁜 삶이 이어져야 뭔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동시에, 지난 1년간 여유가 있다 못해 게으르기까지 했던 미국에서의 삶의 리듬에 맞춰져 있어서 그랬던 탓인지, 바쁜 스케줄을 소화해내기가 꽤나 벅차다고 느껴졌다.
평생을 서울에서 살아왔는데, 왠지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서울을 떠나 있다 돌아오니, 서울의 삶과 사람들은 정말 바쁘구나 라는 생각이 문득문득 났다.
그렇게 운전을 연습하고, 일본어와 영어를 배우러 학원에 다니고, 부모님,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다 보니 6월이 정말 순식간에 지나갔다.
이제는 한국에서의 생활에 다시 적응해 푹푹 찌는 7월을 맞이했다. 바쁜 서울의 삶, 내 한국에서의 생활 패턴들에 다시 익숙해져 행복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아들, 오늘은 뭐하니? 하는 거 없으면 이따 엄마랑 장이나 보러 가자."
학원도, 약속도 없었던 그 날, 방에 선풍기를 켜고 땅바닥에 누워 핸드폰을 보고 있는 나에게 엄마는 같이 장을 보러 가자고 하셨다.
우리는 차를 타고 하나로 마트로 향했다. 엄마는 익숙하게 장바구니를 차에서 꺼내셨고, 나는 카트를 가지고 왔다. 그렇게 우리는 장을 보기 시작했다. 나는 엄마를 따라다니며 익숙하게 카트를 끌고 있었다.
"아들, 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카트를 끌었다. 장을 본 지 한 10분쯤 지났을 때였을까,
핸드폰으로 카톡이 왔다.
"야 오늘 갈 거냐?"
동네 친구의 카톡이었다. 뭐 우리야 거의 매일 만나서 동네에서 노니, 보나 마나 오늘 저녁에 동네에 나와 같이 놀자는 연락이겠거니 했다.
"어딜?"
"뭘 어딜이야. 진짜 몰라?"
"??????"
오늘은 동네가 아니고 다른 곳에 가려나? 싶었다.
"뭘 어딜 가?"
"뭐야 진짜 못 들었어?"
"??? 뭘"
그리고 친구가 보내온 카톡 하나.
"오늘 아침에 형준이가 하늘나라로 갔단다."
"음?"
그 이후 30분 동안 머리가 멍했다. 머릿속에 아무 생각이 안 났다. 그저 멍하니 카트를 끌며 엄마를 쫓아다녔다.
엄마도 내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셨다.
"아들, 왜 그래?"
"친구가 죽었대요."
"어머나.. 누구?"
"그 뇌종양 앓고 있던 친구 있잖아? 그 친구가 오늘 아침에 하늘나라로 갔대.."
내겐 뇌종양 때문에 오랜 시간 아팠던 중학교 시절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2학년 때 우리 중학교로 러시아에서 전학을 왔다. 비록 같은 반이진 않았지만, 나랑 그 친구는 어쩌다 보니 친구가 되어있었고, 우리는 3학년 때 같은 반이 되었다.
그때 그 친구와 많이 친해졌었다. 3학년 때 우리 반은 단합이 잘 되어 다들 정말 친하게 지냈었다. 대부분의 반 남자애들이 같이 축구부도 했었던 탓에, 매일같이 축구를 하고, 서로 집에도 많이 놀러 가고, 학교 끝나고도 같이 많이 놀고, 따로 만나서도 많이 놀았었다. 나는 그 친구와 항상 무리에 있었다.
그리고 우린 다른 고등학교를 가게 되었다. 그래도 우리는 축구팀을 만들어 주말마다 공을 찼다. 그리고 내 동네 친구가 이 친구와 같은 반이 되어, 우리는 다른 학교에 있어도 서로 가깝게 지냈다.
그러다 같은 반이던 동네 친구에게 이 친구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주 축구를 하다 어지럼증을 호소하던 친구가 뇌종양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이었다. 사실 그 당시에는 나도 어려서 뇌종양이 어느 정도 심각한 병인지 잘 알지 못했다.
소식을 꽤나 늦게 접한 탓에, 친구의 병문안을 가진 못했다.
1년 뒤, 나는 친구들과 함께 인천으로 이사 간 그 친구의 집으로 찾아갔었다.
친구의 모습은 정말 많이 바뀌어 있었다.
축구를 하던 친구의 터질듯한 허벅지는 내 팔뚝만 한 크기로 바뀌어 있었고, 친구는 나에게 과자봉지조차 깔 힘이 지금은 없다고 말했다.
그래도, 우리는 또 모이면 예전의 중학교 시절 철없는 아이들처럼 서로 깔깔대며 놀곤 했다. 그 이후, 나는 그 친구를 매년 3~4번씩은 꾸준히 보았다. 그 친구가 잘 있는지, 건강이 많이 호전이 되었는지, 나는 친구를 만날 때마다 확인하곤 했다.
고3 시절이 끝나고도, 재수가 끝나고도, 내가 한창 공황장애로 방황할 때도, 심지어는 작년에 유학에 가기 전에도 친구를 만나 같이 밥을 먹고 얘기를 많이 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정말 많이 호전이 되어서 친구가 예전처럼 생활을 할 수 있길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미국에서도 우리는 연락을 하고 지냈다. 내가 한국에 돌아가면 맛있는 밥 한 끼 사주겠다고 연락을 했을 때 친구가 자신이 재발했다는 소식을 보내왔다. 그래도 심각한 것은 아니라 나에게 맛있는 밥을 기대하고 있겠다고 했다. 내가 한국에 가면 정말 맛있는 것을 사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이후, 나는 한국에 돌아와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친구는 자신이 괜찮은 시간에 연락 주겠다는 말과 함께, 1달 정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왜 그런가 하던 찰나에 이런 소식을 접하게 된 것이다.
엄마가 장을 보시는 동안, 나는 중학교 시절 같은 반이었던 친한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그렇게 나는 중학교 시절 친한 친구 2명과 저녁에 급히 장례식장인 인천으로 향했다.
그렇게 거의 2시간 반 정도가 걸려 도착한 장례식장. 중학교 시절 친구들과 동창들이 앉아 있었고, 나는 친구를 위해 묵념을 하고 부모님께 인사를 드렸다.
"작년쯤에, 방배역에서 한번 본 것 같은데, 유덕이라고 했었나?"
"예 맞습니다."
"그래, 먼 길 와줘서 너무 고맙다. 밥은 먹었니? 밥부터 먹으렴."
"예.."
나는 자리에 앉아 밥을 먹기 시작했다. 담배를 피우고 들어오겠다던 나와 같이 왔던 친구들이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인사를 하고, 나는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분위기는 무겁지 않았다.
사람들이 점점 많이 오자, 부모님은 우리에게 방을 하나 더 빌릴 테니, 그곳에 가서 우리끼리 놀라고 하셨다. 우리는 짐을 싸서 다른 방으로 옮겨 갔다.
다들 갑작스럽게 소식을 접한 탓에 많은 친구들이 오진 못한 것 같았다. 오고 있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여행 중이거나, 사정이 있어 참석하지 못한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는 연락조차 못 받은 친구들도 있는 듯했다.
"야 유덕, 우리는 이제 갈라고. 너는 어떡할래?"
"나는 조금 더 있을게."
"그래. 미국 가기 전에 한번 더 따로 보자."
같이 왔던 친했던 친구들이 자리를 뜨고, 대부분의 친했던 아이들도 다 집으로 향했다. 장례식장이 인천인 만큼, 대부분의 아이들이 이제 거의 밤 9시가 다 된 시각에는 출발을 해야 했다.
나는 조금 오래 남고 싶었다. 늦어도 돈이 많이 나오더라도 그냥 택시 타고 집에 가면 되니까 라는 생각을 했다.
중학교 때 친했던 애들이 대부분 떠나고, 남아있는 동창들과는 꽤나 어색한 사이라 혼자 구석에서 조용히 소주를 계속 따라 마셨다.
거의 물을 마시듯 소주를 마셨다. 잘하지도 못하는 술을 계속 털어 넣었다. 3병쯤 먹었을 때였을까, 이제는 대부분의 친구들이 다 떠난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친했던 친구 한 명이 나를 동네까지 태워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친구 덕분에 빠르고 안전하게 집에 왔다.
아파트에 도착하자 취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먼저 간 친구에 대해 헛소리를 하며 비틀비틀 아파트 현관에 도착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자, 엄마가 딱 내리셨다.
"어 아들, 왔구나. 아이고, 술을 많이 먹었네. 엄마는 차가 제대로 잠겼는지 기억이 안 나서. 한 바퀴 돌고 들어갈까?"
엄마는 취기가 잔뜩 올라온 나에게 술도 깰 겸 한 바퀴 돌고 들어가자고 하셨다.
나는 아파트를 돌며 엄마에게 친구에 대해 얘기했다.
"친구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렇게 빨리 가는지.."
"엄마도 참 안타깝다. 특히 유덕이가 책임감이 강한 성격이라서 친구에게 못해줬다는 생각이 많이 나나 보네."
"하지만 유덕아, 유덕이가 잘 받아들여야 해. 친구도 어쩌면 그걸 바라고 있을지도 몰라."
엄마는 나를 위로하셨다. 엄마에게 한창 얘기하다 보니, 정신을 차릴 때쯤에는 내가 엉엉 울고 있었다.
그렇게 집에 돌아와 나는 그날 울다 지쳐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