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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덕 Jan 01. 2020

23살, 유학에 대해 후회하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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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장례식이 끝나고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3일간 계속 장례식장에 있다 보니, 시간 개념이 좀 무뎌졌었는데, 또다시 바쁜 일상으로 돌아오니, 이제 정말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온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7월 중순이라니.. 이제 한 달밖에 안 남았네.."


그리고 친구의 죽음에서도 2주 정도 잘 헤어 나오지 못했다. 친구에 대한 생각이 일상에서 문득문득 떠오를 때면. 우울함과 무력함에 사로잡혀, 하고 있는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그냥 꾸역꾸역 하루 일과들을 소화해나가고, 무력하고 시간을 보내고 있을 찰나에 아빠가 방에 누워 핸드폰을 하고 있던 나에게 말하셨다.


"이번 주말에 온양에 가는 거 잊지 않았지? 아주머니 만나고 천안 가서 할머니 댁에 들렀다가 올라올 거야."


요 며칠간 친구의 일 때문에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아 맞다.. 이번 주말이었구나." 


나에게는 맞벌이셨던 부모님을 대신하여 어린 시절 나를 돌봐주셨던 감사한 분들이 참 많다.

온양 아주머니는 그분들 중 한 분인데, 유치원생이던 꼬꼬마 시절부터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나를 잘 돌봐주셨던 분이다. 


일을 하시는 부모님을 대신해, 대부분 학교에서의 학부모 행사나 그런 것들에도 대신 참석도 해주시고, 학교 갔다 오면 부모님이 오시기 전까지 부모님의 역할을 대신 다 해주셨던 분이다.


"아주머니가 누나랑 유덕이를 얼마나 사랑으로 키워주셨니. 엄마는 아직도 그게 감사해."


부모님은 가끔 가다 나에게 종종 아주머니 얘기를 해주시곤 했다. 최근에 아빠에게 나랑 누나가 너무 보고 싶으시다면서 오랜만에 연락을 하셨다고 한다. 부모님 또한 아주머니를 너무 반가워하셨고, 우리 가족은 1박 2일로 온양에 여행을 가는 겸 아주머니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아주머니와의 약속을 잡고, 그 날 저녁에 다 같이 밥을 먹을 때, 엄마가 조심스레 말씀하셨다.


"아주머니는 참 대단한 분이셔. 그걸 다 겪어 내시고도 또 이렇게 자리를 잘 잡고 잘 사시니."


사실 아주머니와 헤어진 이후로, 나는 아주머니의 소식을 간간히 엄마를 통해 들어왔지만, 대부분의 소식이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들 뿐이라, 마음이 참으로 아팠다. 누군가가 아주머니의 지난 일들에 대해 듣는다면, 정말 안타깝다는 말밖에 연신 할 수 없을 정도로 비극을 많이 겪은 분이셨다.


오랜만에 은혜를 입은 분을 만난다고 하니, 어색하면서도 괜스레 설레었다.


약속 당일날이 되어, 우리는 차를 타고 온양으로 향했다. 아주머니의 가게가 있는 온양시장 앞에 온천에서 머무르며, 저녁을 같이 먹기 위해 우리는 아주머니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거의 15년 만에 만난 아주머니, 모든 것이 그대로 셨다. 


"아이고, 우리 유덕이가 벌써 이렇게 컸네. 이제는 장정이네 장정!"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뭔가 입이 잘 안 떨어졌다고나 할까. 우리 가족은 그 날 아주머니와 15년 동안 못했던 얘기들을 많이 했다. 나는 뭔가 멋쩍어서 말을 많이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부모님과 아주머니는 참으로 많은 얘기를 나누셨다.


"제가 아직도 유경, 유덕이 사진을 가지고 있어요. 어쩜 시간이 지나도 아이들이 이렇게 생각이 나는지.."


아주머니는 가방 속에서 어린 시절 나와 누나가 찍힌 사진을 꺼내 보이셨다. 사진의 뒤에는 "보고 싶은 아이들."

이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유덕이가 참 이쁘고 착하게 잘 자라준 것 같아서 저도 기분이 너무 좋네요."


그렇게 한참 추억에 빠져 얘기를 하고 우리는 숙소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다음날, 우리 가족은 짐을 싸고 온양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주머니께서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우리가 있는 곳으로 또 오셨다.


아주머니가 정말 많이 아쉬워하셨다.


"유덕아, 건강하게 잘 지내고, 내년에 또 한국 오게 되면 꼭 온양에 놀러 와."

"네. 꼭 올게요."


그렇게 우리는 아주머니와 헤어진 후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 도착한 이후,, 나는 또 한 달밖에 남지 않은 서울의 삶으로 돌아갔다. 


돌아갈 때가 되니, 친구와 지인들과의 약속이 많이 생겼다. 특히 중학교 3학년 때의 친구들을 다시 꼭 봐야 할 것 같았다. 친구의 죽음이 너무 갑작스러웠을뿐더러, 대부분 남자인 친구들은 군대에 있거나 나머지는 연락이 잘 안 가서 아직 모르고 있는 친구들이 꽤나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담임 선생님께도 이 소식을 전해야 할 것 같았다.


중학교 3학년 때의 나의 담임 선생님은 나의 학창 시절에 나에게 특별했던 담임 선생님들 중 한 분으로 남아있다. 


아무래도 부모님이 두 분 다 교사시고, 교사 생활을 하신지 오래되셨기 때문에 나는 학창 시절에 종종 부모님을 아는 선생님들을 만나곤 했다. 


특히 중3 때 나의 담임선생님은 우리 부모님과 일을 모두 해보신 적이 있고, 아빠와는 같은 과목의 선생님이셔서 아빠가 교사 생활을 막 시작하셨을 때 선생님께서 이것저것 많은 것을 알려주셨다고 한다. 아빠의 직장 선배 정도라고나 할까. 그 이후에도 아빠와 선생님은 여러 학교에서 같이 여러 번 일을 하셨다. 아직까지도 아빠와 선생님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 지속적으로 만나신다.


처음에 선생님이 내 담임이라는 것을 들었을 때는 꽤나 부담스러웠다. 부모님께도 말씀드렸을 때 부모님은 웃으며 말하셨다.


"하하하하하하. 일부러 데려가셨나 보다."


그 해 우리 반이 말썽을 좀 많이 부리는 반이어서, 아마 선생님 속이 많이 썩으셨을 것이다.

그리고 선생님은 우리 반을 마지막으로 담임을 그만두시고, 학교를 옮기시고 아빠와 마지막으로 근무를 같이 하시고 은퇴를 하셨다.


꽤나 오랜만에 중3 때의 친구들과 선생님께 연락을 돌려 동창회를 열었다. 

동창회라고 하기에는 많은 친구들이 오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그 날 약속 장소로 향했다.


선생님께서는 7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하게 여전히 그대로 셨다. 친구들도 간간히 봐오긴 했지만 최근 거의 3년간 만나지 못했었는데 다들 그대로였다.


우리는 서로 인사를 하고 선생님과도 인사를 하고, 식사 후에 카페에 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친구들과 선생님이 얘기를 할 때 머릿속으로 친구 생각이 많이 났다. 


마지막으로 중3 친구들이 모인 게 첫 수능이 끝나고 였는데, 그때 나는 친구가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 친구에게 연락을 해 수능도 끝났으니 만나자고 했었다.


그때는 친구의 건강이 꽤나 호전되어서 만나서 재밌게 놀고 친구가 나에게 중3 때 친구들이 뭐하고 사는지 궁금하다며 동창회를 열어보는 것을 제안했었다.


나도 중3 때 친구들이 보고 싶어 그때 나와 친구가 주도적으로 친구들을 모아 동창회를 열었었다.


4년이 지난 지금, 친구가 없는 것이 너무나 아쉬웠고 슬펐다. 


우리는 선생님과 인사를 하고, 우리끼리 술을 마시러 갔다.

다시 우리끼리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추억에 잠겼다. 1년마다 친구들을 모아서 자주자주 보자고 다들 얘기하며 거의 새벽 1시가 돼서야 다들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이제 미국으로 돌아가기까지 열흘 남짓이 남은 때였다.

혼자 집으로 걸어오는 길, 적당한 취기와 시원한 여름밤 바람, 왠지 모르게 허전하고 쓸쓸한 기분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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