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말 다 괜찮은걸까?
태국 사람들의 정서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말로 '마이뺀라이'라는 말이 있다.
마이(ไม่)는 아니다, 뺀라이(เป๊นไร)는 상관하다, 관계하다 로 번역되니까, 일반적으로 마이뺀라이는 우리말로 '괜찮아', '상관없어', '신경 쓰지 마' 등으로 이해하면 된다고 한다. 굳이 영어로 말한다면 'no problem', 'never mind' 정도로 볼 수 있을까?
미소의 나라로 알려진 태국답게 태국 사람들과 지내다 보면 인사말인 '싸왓디 크랍/카' 나, 감사합니다란 뜻의 '컵쿤 크랍/카' 말고는 가장 많이 듣는 말인 것 같다. 태국 사람들은 길가다가 어깨를 부딪쳐도 마이뺀라이, 복잡한 지하철에서 발을 밟아도 마이뺀라이다. 이 말은 외국사람들에게만 하는 특별한 말이 아니고, 자기들끼리도 자주 쓰는 말이다. 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역시 태국은 미소의 나라군! 역시 친절이 몸에 밴 사람들이야! 걸핏하면 핏대부터 세우는 우리나라 사람들 하곤 다르군! 하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조금 더 살다 보면 황당한 마이뺀라이를 겪게된다.
그것은 분명히 태국 사람 자기가 잘못했는데도 마이뺀라이 라고 하는 거다. 책 제본을 맡기고 약속한 날에 찾으러 갔는데, 며칠 후에 다시 오라고 하면서 마이뺀라이 다. 태국 사람 특유의 느긋함으로 무사태평으로 일하는 은행 창구직원에게 업무 처리를 재촉하면 당연히 나오는 대답은 마이뺀라이! 약속 시간에 1시간이나 늦게 나와서도 당연한 듯이 마이뺀라이!
마이뺀라이, 괜찮아 라고 할 사람은 난데, 왜 니들이 마이뺀라이 라고 하는거니? 도저히 이해가 안돼서 친한 태국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마이뺀라이에는 '미안해! 내 잘못이야!'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그러면 그렇지 미치지 않은 이상, 자기가 잘못해 놓고서 자기 입으로 괜찮아 라고 말하는 것은 말이 아니고 낙타지 낙타!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전을 찾아보면 그런 뜻은 나오지 않으니 문제다. 분명 맥락상으로는 '미안해'라고 번역하는 게 맞는데, 정말 저 사람들이 미안해하는지는 정말 알 수 없다.
하지만 조금만 조금만 더 살다 보면 마이뺀라이에 대한 심각한 철학적 고찰을 하게 된다.
태국 사람들과 어울릴수록 이들의 미소는 얇은 얼굴 가죽 이상의 미소는 아니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내가 사는 콘도 직원이나 경비는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치지 않으면 인사를 하지 않는다. 물론 정면으로 마주치거나 내가 먼저 인사를 하면 당연히 깍듯하게 인사하지만... 사람은 로봇과는 달리 초감각적인 존재라서 뻔히 저 사람이 나를 인식했다는 느낌을 가지는데도, 못 본 척 외면하고 옆으로 지나치는 사람을 보면 좋은 느낌을 가질 수가 없다.
태국 사람들은 자신이든 남이든 속마음을 드러내는 것을 꺼린다고 한다. 그래서 큰소리를 내지 않고 마이뺀라이라고 한다. 큰소리를 낸다는 것은 교양 없는 사람, 무식한 사람이 되는 거다. 내가 사는 곳이 시장 옆인데도 상인들끼리 큰소리로 싸우는 것을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태국에서 태국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이 많을수록 부탁할 일이나 도움받을 일도 많아진다. 그럴 때 이들 태국 사람들 대부분은 얇은 미소를 띠며, 큰소리를 내지도 않고 마이뺀라이 라고 한다. 아니면 철저한 무응답과 무관심으로 답을 해준다. 이 정도면 우리 좀 친해진 거 아닌가? 이 정도는 좀 도와줄 수 있는 거 아닌가? 아닌가 보다... 태국에 와서야 왜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이 많다고 하는지를 뼈저리게 느끼는 일이 많아졌다.
사람 사는 일이 잠깐 어깨를 부딪치거나 발등을 밟는 일만 있는 게 아니다. 본의 아니게 상대방 마음에 상처를 줄 수도 있고, 금전적인 손해를 끼칠 수도 있다. 살다 보면 좋은 일만 있는 게 아니고, 모든 일이 계획대로 예상대로만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마이뺀라이, 아 난 괜찮아! 신경 쓰지 마!라고 하는 게 정상일까? 문화 차이를 뛰어넘는 게 사람의 본성이라면, 사람의 본성은 아프면 아프다고 하는 거 아닐까?
태국 사람들의 마이뺀라이는 나에게는 '아 괜찮아! 이왕 벌어진 일이잖아! 하지만 여기 까지야! 더 이상 신경쓰게 하지 마!'라고 들린다. 복잡한 것을 싫어하고, 남의 일에 끼어들기를 싫어하고, 남에게 간섭받기를 싫어하는 태국 사람들의 속마음이 겉으로 나타난 것이 '마이뺀라이'가 아닐까? 이왕 벌어진 일이니 넘어가자 하지만 그 이상은 안돼!
이왕 벌어진 일이 아니라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있을 때 (그게 어려운 일이면 더) 이 속마음은 여실히 드러나는 것 같다. 좀 복잡하지만 조금만 신경 쓰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좀 어렵지만 함께 하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 태국에서 살아갈수록 이들의 마이뺀라이는 과거지향적이다, 이들의 마이뺀라이는 이기적이다. 남의 일에 핏대를 좀 올리기도 하고, 싫은 사이라도 일은 어쨌든 해놓고 보고, 내가 좀 손해를 봐도 가끔은 남을 도와주는 그런 한국 사람들 정서하고는 많이 다르다.
마이뺀라이! 마냥 좋은 말은 아니다. 우리와 다른 태국 사람들의 정서, 알고 나면 마음을 조금 덜 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