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룰루랄라 Feb 21. 2020

수고했다 심장아!   장하다 다리야!

태국에서 생애 처음 10.5Km 완주

해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장거리 달리기를 우리나라도 아닌 태국에서 해 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근육보다 비계가 많은 몸이라서, 무릎이 좋지 않아서, 원래 달리기를 못 하니까, 다리가 달리기엔 좀 짧아서, 심장 근육이 달리기에 안 맞는 종류라서 라는 갖가지 이유로 달리기, 특히 오래 달리기를 멀리 해왔다.   

그러다가 가끔이라도 달리기 얘기가 나오면 '나이 들어서 그런 거 하면 다쳐!', '사는 것도 힘든데 애써 힘든 걸 뭐하러 하냐?', '이 나이엔 그동안 안 하던 거 하면 안 돼!' 같은 이유를 대면서 더 이상의 대화를 막곤 했다.


태국에 온 지 10개월째.

자원봉사자라는 뭔가 신성하고 고귀할 것 같은 느낌도 사라진 지 오래고, 파견된 학교도 학생도 나와 내 가르침에 아무 관심도 없다.   이국의 신기함과 호기심들이 사라지고, 예상했던 것들이 하나둘씩 어긋나고 그리고 태국어와 태국 사람은 여전히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들일 뿐이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이 곳 학교와 학생들이 나를 원하지 않고, 내가 계획한 삶도 그릴 수 없다면 더 이상은 시간 낭비일 뿐인데 그만 돌아갈까?   더 이상 있을 이유가 없잖아!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것은 아닌데...'   밤마다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는 나날을 보내다가 우연히 페북 이벤트 창에서 하프 마라톤 알림을 봤다.


그래 뭐라도 해보자.   이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절박한 마음에서 덜컥 달리기 참가비를 내버렸다.   500밧!

인생 첫 마라톤(10.5Km라도 나에겐 마라톤이다.) 완주를 위해 15번 차례 동안 90Km를 뛰며 연습했다.   자봉이에겐 큰돈인 2,300밧짜리 러닝화도 사고, 의욕만으로 연습하다가 무릎이 아파서 며칠씩 쉬기도 하고, 인터넷을 보고 호흡법과 미드풋 착지라는 안전한 달리기 방법도 날림으로 배우면서 그 날을 기다렸다.


드디어 생애 첫 마라톤에 참가하는 날!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싼야 선생이 새벽 4시에 내 숙소 앞으로 날 데리러 왔다.   원래는 술꾼이었다가 의사의 협박성 충고와 경고를 듣고 마라톤 마니아로 환생한 싼야 선생이 날 태우러 왔다.   올해 65살인 싼야 선생은 전국을 돌며 거의 모든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고 있는 분이다.   집에 마라톤 참가 메달이 벌써 60개가 넘게 있다는...


마라톤에 참가하기 전에 병원에 먼저 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주는 터프한 운전 솜씨 덕에 1시간 거리를 40분 만에 도착했다.   하프 마라톤을 뛰는 선수들이 5시에 출발하고, 난 5시 45분에 Start!

처음이라는 긴장감과 새벽의 약간 축축하면서도 신선한 공기 속에 살아 있다는 느낌을 안고 드디어 출발!


혼자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과 함께 뛴다는 게, 산과 함께 들과 함께 퇴근하는 달과 함께 출근하는 해와 함께 느닷없이 꼬리를 흔들며 달려드는 동내 개(넌 좀 빠져줄래!)와 함께 뛴다는 게 참 좋았다!

러닝머신에서 보다 빠른 기록으로 완주!   

전체 900여 명 중에 10.5Km를 뛴 선수들은 540명.   그중에 200등으로 들어왔다.

나중에 참가자 명단을 보니 540명 중에 외국 사람은 나와 미국 사람 1명뿐이었다.

기록보다 등수보다 완주를 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나에게 상을 주고 싶다.

터지지 않고 버텨준 심장아 수고했다!   6백만 불의 사나이 다리가 돼준 다리야 수고했다!


처음이면서 외국에서 뛰어 본 달리기라서 여러 가지가 낯설고 신기했다.

특히 여성 가이드들이 Finish 시간이 적힌 풍선을 달고 같이 뛰는 게 참 인상적이었다.   처음에 '60 min'라고 써진 풍선을 달고 뛰는 가이드를 따라 뛰다가, 저들은 사람으로 변장한 날렵한 사슴이란 걸 깨닫고 뒤따라 가길 포기했다.   날렵한 사슴이 뛰는 것처럼 아무 힘도 안 들이고 사뿐사뿐 뛰는 아니 날아가는 모습은 아름답지만 이 또한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다.   '70 min' 풍선을 단 가이드는 나에게 사람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10.5Km보다는 훨씬 멀게 느껴지는 10,500 미터를 달리는 나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 준 것은 중간중간에 있는 거리 표시판이었다.   2Km마다 있는 급수대 보다 나에게 힘을 더 준 것은 거리 표시판이었다.

내가 뛰어 온 거리를 알려주고, 내가 더 뛰어야 할 거리를 알려주는 거리 표시판이 없었다면 너무 빨리 달리거나 너무 늦게 달려서 페이스를 잃고 중간에 힘들어서 포기하진 않았을까?


생애 첫 마라톤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생각했다.

지금 한창 취업 준비를 하고 있는 아들에게, 남편 없이 고군분투하고 있는 아내에게 그리고 아직도 이국에서 방황하고 있는 나에게 이젠 믿고 따라갈 수 있는 백만 하나 에너자이저 가이드가 되어야겠다고, 삶의 길이 안 보일 때 고개 들어 쳐다보면 삶의 그림이 그려지는 인생 표시판이 되어야겠다고.


작가의 이전글 처음엔 이상한 것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