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제야 알았을까?
태국에 같이 온 동기들과 떨어져서 실제로 '나 혼자 산다' 생활을 시작한 지도 벌써 일곱 달이 넘어간다.
혼자 생활하는 즐거움도 있지만 혼자 살수록 불편한 것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는데, 그중 불편하고 귀찮은 게 먹는 거다. 워낙 먹는 거에 별 관심이 없어서 있으면 있는 데로 없으면 없는 데로 먹는, 아니 그냥 뚝딱 해치우는 스타일인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삼시 세 끼를 혼자 감당해야 하니 이게 장난이 아니다.
그동안 아침은 우유와 시리얼, 점심은 일하는 학교 근처에서 태국 음식으로 간단히, 저녁은 동네 주변 길거리 태국 식당에서 때우거나 가끔은 그냥 맥주 한 캔으로 지내왔다.
이렇게 한 달 정도 살면서 오는 변화!
첫째로 살이 빠진다. 좀 살이 찐 편이라 반가운 일이긴 하지만, 찔 때는 균형감 있게 골고루 찌던 살이 빠질 때는 제 맘대로 빠진다. 특히 얼굴 살이 급격하게 빠지면서 얼굴은 점점 유해진과 배영만을 닮아가고, 그놈의 뱃살은 여전히 충직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배는 올챙이 배가 되어간다.
두 번째로는 먹는 게 너무 지겨워진다.
잠깐 왔다가는 여행자가 아니라, '나는 태국인이다'가 되어 몇 달을 살게 되면 동네 주변에서 만나는 태국 음식이란 게 국수 아니면 밥이다. 밥은 삶거나 튀긴 돼지고기나 닭고기를 얹거나 여러 재료를 넣고 볶거나... 더구나 넣는 부재료가 비슷하고 맛이 강해서 뭘 먹어도 똑같은 맛이다. 그리고 너무 달고, 너무 맵고...
늙은 유해진 얼굴에 올챙이 배를 장착한 키 작은 남자! 곤란하다! 아주 곤란하다!
그래서 내린 결론! 만들어 먹자!
그동안 한국에서는 라면과 볶음밥 정도, 놀러 가면 고작 고기 굽는 거나 카레가 전부인 실력이지만 필요는 발명을 낳는다니까!
찾아보니 주변에 '타이-이싼 시장'이라는 제법 유명한 새벽시장이 있다. 가서 보니 정말 놀라운 신세계!
황정민이 사랑하는 부라더는 없지만 감자, 양파, 당근, 배추, 무, 파, 상추, 고추, 고춧가루 등등이 다 있다.
정말 없는 거 빼고 없는 게 없다. (이상하게도 대파는 없다.)
그래서 요즘은 '1식 3찬 더하기 국이나 찌개'를 목표로 용맹정진 중이다.
재료는 가까운 시장에서, 레시피는 인터넷에서 구하니 어려울 일도 없다.
김치찌개, 된장찌개, 계란탕, 김칫국, 된장국, 계란말이, 대파김치, 멸치볶음, 냉면, 쫄면, 김치말이 국수, 돼지고기 장조림, 메추리알 조림, 계란조림, 무채, 양파볶음, 감자조림, 감자볶음, 떡볶이, 짜장밥, 카레, 겉절이 김치...
수미 아줌마와 백종원과 이연복 세프 그리고 유튜브의 하루 한 끼, 만개의 레시피가 많이 도와줬다.
조금씩 다시 탱탱해지는 볼살과 꽉 찬 냉장고를 보면 입가에 미소가 절로 피어난다.
그런데 이렇게 음식을 만드는 즐거움과 먹는 즐거움에 쏙 빠지면서 알게 된 것!
내 몸엔 천재 요리사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
어떻게 처음 만드는 음식인데도 이렇게 맛이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 사실 모두 다 태국 재료에 태국 음식 부자재를 쓰면서 이렇게 맛있게 만들기도 쉬운 일이 아니잖은가!
이제야 내 천재성을 깨닫게 된 것이 많이 아쉬울 뿐이다.
돌아가면 태국 음식점을 차릴까? (아 너무 나간 것 같다.)
두 번째로는 우리의 모든 음식에 설탕이 많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태국 사람들이야 밥에도 설탕을 뿌려서 먹는 사람들이니 따로 얘기할 필요도 없지만, 거의 모든 우리 음식 레시피에 설탕이 꼭 들어간다. 그래서 한 번은 알려준 레시피에서 설탕을 빼고 했더니 맛이 안 난다.
내 천재성은 설탕과 인공 조미료 덕인가?
그나저나 오늘 뭐 먹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