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니 맛있고 즐거운 세상이 나타났다.
평소에 먹는 거에 별 관심이 없이 살아왔다.
그저 있으면 먹고, 없으면 안 먹는 주의랄까.
TV나 유튜브, 블로그에 나오는 맛있다는 식당엘 일부러 찾아가 본 적은 없다.
어쩌다가 친구들을 따라 유명하다는 식당엘 가봐도 맛은 반 타작? 사실 뭐 사는 게 다 반반이니까...
그래서 평소에도 사람들이 줄 서서 기다리는 곳보다는 좀 덜 시끄럽고 이왕이면 인테리어가 좀 깔끔한 곳을 가곤 했다.
하지만 이렇게 먹는 거에 별 까탈스럽지 않은 나도 좀 꺼리는 것이 있으니 그게 바로 당근과 산초다.
나에겐 화장품 냄새로 기억되는 산초야 자주 먹는 게 아니니까 별 문제가 없지만 당근이 좀 문제.
즐겨 먹지는 않지만 삶거나 익힌 당근은 그나마 괜찮은데, 생당근은 이상하게 먹기가 힘들었다.
모르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생당근을 씹으면 뭔가 생당근 특유의 이상한 향이 나서 먹기가 쉽지 않다.
전날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셨어도 당근주스로 해장하는 일은 나에겐 없었다.
부임지인 태국에 올 때도 다른 걱정은 별로 없었는데, 태국 음식엔 이 곳 특유의 채소나 향신료가 많이 들어간다는 얘기가 신경 쓰였다. 아무래도 현지 음식을 자주 사 먹을 텐데 입에 안 맞으면 어쩌지!
그중에도 특히 태국 음식에 많이 들어간다는 고수, 태국 말로는 팍치라고 한다.
그래서 '마이 싸이 팍치 크랍', '고수는 넣지 말아 주세요!'라는 말을 외우고 다녔다.
한 두 주가 아니고 태국에 몇 달을 살다 보니 이제 사 먹는 것도 지겹다. 솔직히 입에도 안 맞고...
그래서 차츰 집 근처에 있는 '딸랏 타이 이싼' 이라는 아침 시장에 가서 장을 보기 시작했다.
누가 만들어 준 거, 만들어 놓은 거, 파는 거, 이왕이면 사기 쉬운 거, 가까이에서 파는 거, 빨리 배달되는 거에 익숙한 내가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기로 한 것은 생존 본능과 백종원, 김수미, 이연복, 최현석 세프와 만개의 레시피, 하루 한 끼, 심방골 주부와 후다닥 요리 때문일 것이다.
통 모르는 말만 시끄럽게 오가는 이국의 시장에서, 요리 초보자가 살 수 있는 것은 당연히 내 눈에 익숙한 감자, 양파, 배추, 무, 파, 토마토, 상추, 고추, 마늘 들이다. 희한하게도 이 채소들은 우리 것과 모양도 맛도 똑같다. 물론 당근도 똑같다. 그래서 좋아하지는 않지만 당근도 샀다.
하지만 알게 된 당근의 신세계! 당근이 이렇게 맛있는 채소인지는 정말 태국에 와서 처음 알았다.
싫어하는 그 특유의 향은 없고 대신 달다. 정말 달다. 시원하고 달고 맛있다.
제주무를 처음 먹었을 때의 느낌이랄까!
그런데 값마저 싸다. 보통 크기가 1개에 5밧이니까 우리 돈으로 대략 200원 정도.
태국 생활도 이제 10달째다. 그래서 그런지 고수, 아니 팍치 때문에 태국 음식을 못 먹은 적은 없다.
분명 팍치가 들어간 음식을 많이 먹었을 텐데... 부지불식 중에 이제 이곳 생활에 적응됐나?
설탕이 몸에 나쁘다는 생각에 그동안 '음식은 달지 않게, 커피는 블랙으로'를 외치며 살아왔다. 하지만 여기에서 이젠 '모든 음식엔 설탕을, 커피엔 특히 설탕을 더 듬뿍' 넣어서 먹고 마신다.
처음엔 먹다가 뱉어버렸던 덜 익은 파파야를 지금은 설탕과 고춧가루를 찍어서 맛있게 잘 먹는다.
가끔은 못 먹는 날도 있긴 하다. 왜? 없어서~~~
태국에 처음 왔을 땐 맥주에 얼음을 넣어서 마시는 게 이상했는데, 지금은 냉장고에서 금방 꺼낸 맥주에도 얼음을 넣어서 마신다. 왜? 시원하잖아~~~
하지만 과일의 황제라는 두리안은 아직도 아예 시도도 못해보고 있다.
태국 음식을 시키면 우리나라 상추처럼 딸려 나오는 바나나 꽃도 아직은 먹기가 힘들고, 레몬 글라스와 이국 냄새가 물씬 풍기는 가파오, 말라, 험배, 마크어, 까차이 등등...
너희들도 조금만 기다려라!
사랑이 변해서 쓴맛 단맛 다 본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입맛이 변해서 세상 새로운 맛을 보고 있다.
살면서 변하는 게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모르던 맛, 모르던 사람, 모르던 말, 모르던 문화와 세계를 알게 되는 것은 삶의 큰 즐거움이다.
태국에 잘 왔다!
애써 외운 '마이 싸이 팍치 크랍'이란 말을 써보지도 못하다니... 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