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혼자남의 먹방일기]
아침부터 불협화음의 연속이었다. 전날 말끔하게 매듭지었다고 믿었던 일은 허술하게 풀려 있었고, 한숨 돌릴 새도 없이 이리저리 발품을 팔아야 하는 새로운 지시가 떨어졌다. 찰나의 순간 미간으로 짜증이 확 쏠렸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쩌겠는가. 나는 슬프도록 성실한 K-직장인인 것을.
업무 중 감정의 파고가 일어날 때면 나는 남몰래 주문을 외운다. '나는 기계다. 일터에서 감정을 소모하지 않는다. 노동에 쓰기엔 나의 희로애락이 너무 아깝다. 이 모든 감정은 퇴근 후 오롯이 나만의 시간에만 꺼내어 쓰자.' 그렇게 스스로를 차가운 금속성으로 무장시키고 나면, 끓어오르던 짜증도 잦아들고 그저 묵묵히 활주로를 걷듯 일을 쳐낼 수 있게 된다.
오전 내내 쉼 없이 동선을 짠 탓인지, 정오가 채 되기도 전에 지독한 허기가 몰려왔다. 다행스럽게도 일정이 일찍 마무리되어 이른 점심을 누릴 여유가 생겼다. 일단 주린 배부터 채우고 오후의 전투를 치르자는 생각에, 밥집들이 모여 있는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곳은 방배카페골목.
한때의 화려함은 색바랜 사진처럼 희미해졌지만, 여전히 제법 많은 식당과 카페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스타벅스, 투썸플레이스, 커피빈 같은 익숙한 간판들 사이로, 먹방 유튜버 성시경 씨의 단골집으로 유명한 닭도리탕 명소 '스마일포차'도 보인다. 과거 호스트바가 즐비했던 밤의 거리에서, 오렌지족들의 놀이터를 거쳐, 이제는 압구정이나 신사의 화려함에 밀려 동네 주민들이 소박하게 찾는 골목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부유하지 않고 차분히 가라앉은 지금의 한적함이 더 마음에 든다.
식당을 찾아 헤매며 머릿속에 그린 메뉴는 매콤한 제육볶음이었다. 그러나 골목 어귀에서 장인'감자탕'이라는 글자가 박힌 간판을 마주한 순간, 묘하게도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졌다. 그래, 오늘은 뼈해장국이다. 보통 전날 밤을 알코올로 지새웠거나, 혹은 오늘 밤 알코올로 지새우기 위해 찾는 영혼의 국물. 하지만 나는 어제 술을 마시지도, 오늘 마실 계획도 없는 맨정신임에도 그 뜨겁고 묵직한 국물이 간절해졌다.
이른 점심시간이라 식당 내부는 한산했다. 물론 내가 숟가락을 내려놓을 즈음엔 빈자리 하나 없이 꽉 찼지만 말이다.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뼈해장국 한 그릇을 청했다. 음식을 기다리는 짧은 공백, 어김없이 넷플릭스를 켠다. 여전히 흥미롭게 주행 중인 '야구여왕'을 틀어두고, 가위로 김치를 숭텅숭텅 자르며 기다리니 이내 펄펄 끓는 뼈해장국이 등장했다.
여기서 소소한 TMI를 하나 곁들이자면, 내 남동생은 지독한 감자탕 애호가였다. 저녁 메뉴를 물을 때마다 그의 입에선 반사적으로 감자탕이 튀어나왔다. 반면 아빠는 감자탕을 질색하셨다. 평소 은근히 왕자님 같은 면모가 있으셨던 아빠에게, 커다란 뼈를 손으로 부여잡고 살점을 발라 먹어야 하는 야생적인 식사 방식은 영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동생의 끈질긴 감자탕 타령에 아빠도 마지못해 숟가락을 얹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놀랍게도 지금은 엄마 아빠 두 분이서 오붓하게 감자탕 외식을 즐기실 정도가 되었다. 가정을 꾸린 내 동생은 여전히 감자탕을 사랑하며, 천만다행으로 넓은 아량을 가진 제수씨가 그 지독한 감자탕 사랑을 기꺼이 함께 나누어주고 있는 듯하다.
나 역시 감자탕을, 그리고 뼈해장국을 꽤나 애정한다. 내게 뼈해장국은 일종의 건강식 같은 느낌이다. 몸의 배터리가 방전되어 간다고 느낄 때, 단백질을 빡 밀어 넣어야 할 것 같은 날이면 어김없이 이 국물이 생각난다. 오늘도 뼈해장국에 '본능적으로 느껴졌어~' 쏘리. 이토록 본능적으로 이끌린 걸 보면 나도 모르게 심신이 꽤나 지쳐있었나 보다. 후,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K-직장인의 삶이란... 은 뻥이다. 사실 오전 일이 조금 꼬이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죽을 맛은 아니었다. 그저 먹고 싶었던 거 뿐이다.
그렇게 마주한 뼈해장국은 과연 기가 막혔다. 뼈에서 부드러운 살코기를 살살 발라내어, 국물에 살짝 적시고 소스에도 콕 찍어 입안으로 직행한다.
뒤이어 젓가락으로 쌀밥을 조금 덜어 우물거리다, 이번엔 숟가락으로 밥을 퍼서 뚝배기 국물에 살짝 목욕을 시킨 후 삼켜낸다. 다시 뼈와 살의 해체 작업.
뼈에 붙은 살점이 얼마 남지 않았을 즈음, 마침내 두 손을 써서 뼈의 관절을 우둑 쪼갠다. 자잘한 뼈들을 입가로 가져가 쪽쪽 빨아먹으며 남은 살을 탐하다가,
더 이상은 무리다 싶을 때 미련 없이 뼈통으로 던져 넣는다.
이 성스러운 의식을 반복하는 와중에도 공깃밥의 잔량은 치밀하게 계산해야 한다.
조금 남겨둔 밥을 남은 국물에 미련 없이 말아 훌훌 떠먹고 나면, 비로소 완벽한 식사가 완료된다.
어디선가 스치듯 읽은 기억이 난다. 확실하진 않지만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국밥 1위가 바로 뼈해장국이라고. 또 가장 완벽한 음식이라는 출처 모를 찬사도 본 것 같다. 최초로 뼈해장국을 창조해 낸 이름 모를 선구자에게, 오늘따라 깊은 감사를 표하고 싶다.
PS. 중동 전쟁이 장기화될 전망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애초 최대 4주라고 호언장담했지만, 헤즈볼라가 참전하고 걸프 6개국 등도 참전을 검토하면서 확전 분위기로 치닫고 있다. 불 보듯 뻔하게 기름값은 오를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기이한 것은, 국내 기름값표는 벌써부터 들썩이고 있다는 점이다. 오피넷을 들여다보니 매일 리터당 약 100원씩 무섭게 뛰어오르고 있다. 본디 국제 유가가 국내 주유소 가격에 반영되기까지는 꼬박 2주의 시차가 필요한 법이거늘.
다행히 정부가 이 부분을 들여다본다고 하니, 앞으로 이 문제는 해결되겠지. 그보다 먼저, 전쟁이 조속히 막을 내리고 이란을 비롯한 중동 땅에 평화가 찾아오길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