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점심은] 40대 혼자남이 점심밥 먹은 이야기
오늘 점심은 돈가스를 먹었다.
아침부터 일이 몰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점심은 맛있는 걸 먹고 싶었다. 게다가 비도 왔다.
돈가스는 뭐다? 남자의 소울푸드! 천하의 에겐남이지만, 상남자답게 나는 돈가스를 거의 사랑한다. 하루 세 끼 먹어도 될 정도다.
고백하자면, 그런 나에게도 돈가스 권태기가 있었다. 트라우마 같은 거였다. 그녀와 이별하던 날, 돈가스를 먹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시켜 놓고 먹지는 못했다. 눈앞에 둔 채로 이별을 맞이했다. 그 순간부터 한 달쯤 돈가스를 먹지 못했다.
결국은 극복했다. 지인들(대부분 남자)들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이별의 아픔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돈가스에 트라우마가 생겼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당연했다. 나같아도 그랬을 것이다.
그들은 매일같이 나에게 돈가스를 먹자고 연락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 큰 용기를 내서 먹었다. '혹시 그녀 생각에 눈물이 나지 않을까', '억지로 먹다가 체하지 않을까?'
기우였다. 왕돈가스 맛집으로 유명한, 점심시간 여의도 직장인들로 가득한, 웨이팅은 당연하고 얼마나 기다리면 먹을 수 있을지가 관건인, 여의도 거창왕돈가스에서 권태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녀 생각할 겨를 없이 '오 대존맛' 이러면서 먹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돈가스와 다시 만나기 시작했다. 그녀와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돈가스에도 종류가 있다. 왕돈(왕돈까스), 경양식, 일식. 대체로 컨디션 따라 간다. 자르기 귀찮을 땐 일식,
푸짐함이 필요하면 왕돈, 스프가 당기면 경양식이다. 특히 술 마신 다음날 돈가스가 땡기면 경양식을 간다. 스프로 속을 좀 달래고, 돈가스로 배를 채우면 숙취가 해소된다.
오늘은 일식이었다. 내방역 근처, 고찌소에서 먹었다. 이 근처에 돈가스 맛집이 많지만, 비도 오고 해서 당장 눈앞에 보이는 곳인 고찌소로 갔다.
메뉴 구성이 기가 막혔다. 특히 비가 오는 날에는 딱이었다. 맛은 무난했다. 기본에 충실한 맛. 무엇보다 비 오는, 조금 쌀쌀한 날에 먹기 좋은 미니 우동이 있었다. 안 시킬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미니 우동이라지만 꽤 실했다.
배가 고파 허겁지겁 먹었다. 밥 한입, 돈가스 한입, 국물 한 모금. 샐러드 한입, 돈가스 한입, 우동 한 젓가락.물릴 땐 깍두기다.
사람들은 국밥에서만 깍두기의 중요성을 말하지만, 사실 깍두기는 돈가스에서도 빛을 본다. 느끼함을 잡아주고, 아삭한 식감도 더해준다. 왕돈에서는 고추와 단무지도 중요하다. 물론 고추는 오이고추가 좋다. 난 맵찔이니까.
다 먹고 나왔는데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나의 무선 이어폰인 에어팟 4세대에서는 그녀가 좋아하던 노래가 흘러나왔다. 눈에서 물이 흘렀다. 그건 비였다. 눈물은 아니었다. 오해하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