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한 끼] 40대 혼자남이 저녁밥 먹은 이야기
크리스마스 이브다. 딱히 할 게 없다. 이런 날은 누굴 먼저 불러내기도 애매하고, 누가 부른다고 덥썩 나가기도 애매하다. 괜히 약속 없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서다. 사실 약속 없는 사람이긴 하다.
뻥이다. 사실 난 크리스마스 이브에 약속 있지롱~
지난 10월쯤이었나. 누군가 나에게 말했다. “100일 후면 크리스마스래. 빨리 여자친구 만들어야 되는 거 아냐?”
그 말에 나는 꽤 호기롭게 대답했다. 크리스마스를 누군가랑 꼭 보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 그리고 지금 여자친구가 생기면 오히려 골치 아프다고 했다. 크리스마스 때 뭐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하지 않겠냐는,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 없는 허세였다.
이브를 앞둔 마지막 주말에는 술을 꽤 마셨다. 그러다 작년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냈던 전전 여친에게 연락해볼까, 아니면 전 여친에게 연락해볼까 그런 생각까지 했다.
연락을 하지는 않았다. 불혹이 되면서 그런 미친 짓은 다신 하지 말자고 나 스스로에게 다짐했던 걸 떠올렸기 때문이다. 이악물고 참았다. 참고 나니, 다음 날이 왔다.
아무튼 올해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은 언뜻 보면 40대 초반, 자세히 보면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30대인 남성 둘과 함께하게 됐다. 나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압도적인 외모를 자랑하는 친구들이다. 40대인 나도 그들 앞에서는 절로 겸손해진다.
원래는 아무 예약 없이 돌아다니다가 빈 곳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같이 보기로 한 녀석들 중 한 명이 섬세하게도 하남돼지집 신논현역점에 예약을 걸어뒀다고 했다. 크리스마스 이브인데 예약하지 않으면 갈 곳이 없을 거라는 걱정에서였다. 고마웠다.
호기롭게 강남으로 향했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강남이라니. 아재인 나에게는 그 자체만으로도 꽤 설레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길거리에 사람이 많지 않았다. 다들 식당에 있나 싶었는데, 식당에도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 않았다. 조금 아쉬웠다. 젊은이의 기운을 느끼고 싶었는데.
그때 한 녀석이 말했다.
“형, 요즘 젊은 친구들은 이태원이나 성수 가지 않을까?”
그렇구나. 요즘은 이태원이나 성수를 가는구나. 나는 조용히 '내 마음 속에 저장'했다. 다음엔 이태원이나 성수를 가야겠다. 하지만 내가 가면 여러분은 다른 곳으로 가겠지? 내가 사면 주가가 폭락하는 주식처럼.
크리스마스 이브에 먹는 삼겹살 역시 맛있었다. 함께 먹는 소주도 꿀맛이었다. 나에게 만약 하루 세 끼 '이것'만 먹야한다면, 돈가스 아니면 삼겹살이다. 하남돼지집은 프랜차이즈라 맛은 어느 정도 보장돼 있다고 봐야 한다. 역시 맛있었다. 하남돼지집이 맛있기도 했지만, 얻어먹기 때문이기도 했다. 난 형이라고 사고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동생이 사겠다면 선뜻 (제발) 사라고 계산대에 등을 떠밀어준다. 카드를 꺼내 호기롭게 계산하는 녀석의 뒷모습을 보며, '쟤가 저렇게 잘생겼었나' 싶었다. 뒷통수가.
2차는 기분을 내 봤다. 무려 와인을 마시러 간 것이다. 비노비스라는 곳에 갔다. 분위기가 정말 좋았다. 이런 곳에 남자 셋이 크리스마스 이브에 찾아와 와인을 마신다는 사실이 조금 웃겼지만, 막상 마셔보니 나쁘지 않았다. 와인은 샤도네이를 골랐다. 한 병을 비웠다. 리슬링도 마시고 싶었지만, 남자 셋이 크리스마스 이브에 와인을 더 마시고 싶지는 않았다. 사실 주변 자리에 커플이 꽤 많았다. 그 사이에 오래 머물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샤도네이로 적당히 마무리하고 3차로 맥주를 마시러 갔다. 맥줏집은 브롱스였다. 브롱스도 언제 가도 무난한 곳이다. 이런 날엔 무난함이 제일 좋다. 그렇게 맥주에 피자까지 먹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 하루를 가만히 돌아봤다. 이상하게도 뿌듯했고, 기분이 정말 좋았다.
괜히 카카오톡을 열어 전전여친 이름을 검색해봤다. 전 여친도, 전전전 여친도, 전전전전 여친도. 그녀들과의 대화창에 '자니?'라고 메시지를 남기고 싶었지만, 불혹의 나이임을 다시 한번 상기하며 그만뒀다. 다들 잘 지내는 것 같았다. 아, 정말 기분 좋은 크리스마스 이브다. 기분이 너무 좋다. 진짜다. 아 너무 기분이 좋아서 집에서 술을 더 마시려고 했다. 잔뜩 취해 자고 일어나면 26일. 출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