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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THE NEW GR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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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yun Feb 14. 2020

어쩌다 보니 내가 스타트업의 대표가 되었다

2편. 적자였지만 모든 순간이 좋았다.(와디즈 1차 크라우드 펀딩)


더뉴그레이의 첫 번째 프로젝트, 와디즈 크라우드 펀딩 때 있었던 일들이다. 프로젝트는 크게 여덟 단계를 거쳐 마무리가 되었다.


[펀딩 페이지 구성 > 펀딩 오픈 > 커뮤니케이션 > 촬영 준비 > 촬영 > 사진 전송 > 매거진 제작 > 매거진 배송]


2편에서는 이 과정을 되도록이면 상세하게 담아보려고 한다. 이때의 나를 요약해서 표현해 보면 '무식했지만 용감했다'정도인 것 같다.

돈 한 푼 안 주고(사실 못주고) 매거진 편집디자인을 부탁했고, 구글링으로 배워서 밑천 따위는 없는 포토샵과 일러스트로 비포&애프터 이미지를 만들었다. 어떻게는 만들어 내야 한다는 상황이 의욕을 불러일으켰던 것 같다.


나의 시행착오와 우당탕탕이.. 부디 보시는 분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되길, 그리고 가감 없이 크리틱(critic) 날려주길.




[1. 펀딩 페이지 구성, 그리고 오픈]


"거봐, 형이 이거 된다고 했지?"


#2018년 8월, [크라우드 펀딩을 준비하다]


2018년 여름과 가을 사이 만났던 아빠들

형(코 파운더)과 사마(군대에 간 팀원)가 만난 열 다섯 아빠들의 사진으로 와디즈 크라우드 펀딩 페이지를 만들기로 했다. 당시, 와디즈에서는 소셜 임팩트를 주제로 한 공모전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거다!' 싶었다.


사마의 입대가 30일 앞으로 다가왔고, 지인들에게 부탁하는 상황도 조금씩 버거워지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소셜 임팩트 챌린지> (뭐, 이런 종류의 이름이었던 것 같다)에 지원했고, 거뜬히(?) 서류전형에 통과했다.


#2018년 9월, [펀딩 오픈, 그리고 17분 마감]


2018년 9월 더뉴그레이의 첫 프로젝트


면접인지 미팅인지 모를 그것도 사마가 얘기를 잘한 덕분에 통과할 수 있었고, 펀딩 페이지도 사마가 입대 직전까지 만들었다. 사마가 없었으면, 정말 지금의 더뉴그레이는 없었을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곳, 헬로우젠틀에서 그 어떠한 기여도 하지 못하고 있었던 시절인 셈이다부끄럽지만 사실이다.


어쨌든 그렇게 9월 말, "우리 아빠 프사 바꾸기, 더뉴그레이(THE NEW GREY) 프로젝트" 펀딩을 오픈했다. 그리고, 정확히 17분 만에 펀딩은 마감되었다.



"등산, 낚시가 아닌 멋이라는 카테고리가 그들(아빠들) 가운데 생겼으면 좋겠어요"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실감이라는 게 나기 시작했다. 그때 내가 소셜에 올린 글을 보니 당시의 기분이 되살아난다. 기록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좋은 버릇인 것 같다(갑자기?).


아무튼 곧바로 추가 오픈한 리워드도 다행히 하루가 지나기 전에 판매가 완료되었다. 우리는 완판남이 되었고, 이제는 증명해야 했다. 형이 그때 내게 그랬다. 


"거봐, 형이 이거 된다고 했지?"



[커뮤니케이션과 촬영 준비, 그리고 촬영]


"돈을 내고, 시간을 내서, 굳이 이곳까지 온다고?"


아름다운 결과이긴 했다. 얼마 만에 맛보는 짜릿한 성취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취해있을 수가 없었다. 당장 만나야 하는 36명의 아빠들을 위한 시간을 준비해야 했다.


뚜껑을 열어보니 예상과 다르게 전국 각지에서 아빠들이 올라왔다. 아빠만 올라오는 게 아니었다. 가족들도 함께였다. 적게는 둘, 많게는 열명이 넘는 가족이 고작 3시간을 위해 구미에서, 광주에서, 창원에서 올라왔다. 이런데 어떻게 대충 하냐고..


첫 촬영 이틀 전 썼던 글



#커뮤니케이션과 촬영 준비


참여자 한분 한분 사전에 전화를 드렸고(이건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카카오톡 단톡 방을 개설했다. 그리고 구글 설문지를 통해 사전에 설문을 받았다. 촬영 가능한 날짜와 아버님의 전신사진, 사이즈를 받았다. 그리고 달력에 스케줄 표를 만들어 단톡 방에 공유했고, 구글 드라이브를 통해 촬영 시간 순으로 아버님들 정보를 정리했다. 그걸 형과 공유했다.


오시는 길, 주차하는 법 등의 안내문을 만들어 촬영 전날 가족분들에게 공유드렸고, 촬영 일주일 전에는 동대문 도매 시장에서 다음날 촬영하는 아버님의 착장을 구성했다(가끔 물건이 당일에 안 나오는 경우가 있어서 전날에 준비할 수가 없었다). 쇼핑백에 그냥 옷을 드리기가 정성스럽지 못한 것 같아 슈트케이스도 준비했다.


촬영이 끝나면 사진을 보정하고 원본과 보정 본을 메일로 보내드리기로 했다. 메일 주소 역시 사전 설문지를 통해 받았다. (이 부분에서 시간이 많이 딜레이 되기도 했고, 어떤 컴퓨터에서는 사진이 안 열리기도 했었다.)


당시에 만들었던 스케줄 표와 단톡 방


#촬영


그렇게 2주일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36명의 아빠들을 만났다. 나는 클럽 알바를, 형은 과외를 계속하고 있어서 이틀 정도 못 잘 때도 종종 있었지만, 아빠들을 만나는 시간은 정말 즐거웠다. '오늘은 좀 자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도 막상 아빠들을 만나면 그냥 모든 시간이 즐거웠다.


2018년 10월 19일 첫 촬영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10월 19일 여수에서 올라온 첫 번째 아빠를 시작으로(전날 사모님과 뉴욕 여행을 다녀오셨고, 시차가 아직 있다고 했던 아빠였다, 이런 게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서른여섯 명의 아빠를, 가족을 만났다.


더뉴그레이 서울 창간호의 주인공들


"돈을 내고, 시간을 내서, 굳이 이곳까지 온다고?" 이런 데 어떻게 대충 할 수가 있겠냐고..



[인터뷰, 그리고 매거진 제작]



#인터뷰


인터뷰를 하고 있다.

1년 반이 지나가고 있는 지금도 나는 아빠들의 사소한 이야기 하나하나를 다 기억하고 있다. 짧게는 15분, 길면 1시간 가까이를 들었다. 그저 아빠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를 듣다 보면 때로는 울기도 했고, 나도 모르게 내 이야기를 아빠들에게 하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도,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경험들 가운데 중요한 하나라는 확신이 들었다. 당장은 여력이 되지 않지만 꼭 아빠들의 이야기를 담은 유튜브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아직까지도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여러 가지 시도는 많이 하고 있지만..).


#매거진


레퍼런스를 찾고

이레, 디자이너를 만났다. 이태원 클럽에서 일하면서 매장 포스터를 몇 차례 만들었던 친구인데, 알고 보니 주 종목이 편집디자이너였다.


"나 돈 없는데, 한 번만 도와줘. 나중에 꼭 갚을게. 나중에 돈 많이 벌게 해 줄게"


참, 무례한 부탁이었는데 이레는 그걸 또 흔쾌히 들어주었다. 아직까지 내 기준에선 약속을 지킨 건 아닌데, 꼭 지킬 거다(그러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줘).


이런저런 시도 끝에

아무튼 디자인 작업을 시작했다. 레퍼런스를 찾고, 아이디어를 스케치하고, 여러 가지 샘플 디자인을 만들어 주었다.


편집장의 말도 쓰고


이런저런 의견을 주고받고 최종적으로 표지를 정했고, 그 사이 해가 바뀌어 2019년 1월이 되었다.


인쇄 역시도 이레가 큰 역할을 했다. 굵직한 기업의 팜플랫을 주로 디자인했던 이레는 다양한 규모의 인쇄소를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몇 군데 소개받은 곳 가운데, 가장 저렴했던 (그래도 1부에 10,000원이 넘는 어마한 비용이 나왔지만..) 인쇄소에 인쇄를 맡기게 되었다.


그 사이 나는 주제에 편집장의 말(editor's letter)이라는 것도 쓰게 되었다.


패키징은 이렇게
지금 보니 조잡하지만,, 당시에는 최선이었던

우체국 봉투(장당 400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와 도장집 아들 동생에게 만들어 달라고 한 더뉴그레이 로고 도장과 발송 도장(이 또한 공짜였다), 쿠팡에서 5천 원주고 산 뽁뽁이, 그리고 맞춤 우표(이게 최고 비쌌다, 10개 5천 원 정도)로 패키징을 했다.


그렇게,,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나름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되겠다.




"그러나 적자를 피할 수는 없었다."



돌이켜보니 많은 고민을 했던 것 같다. 와디즈에서도 서비스를 리워드로 제공했던 적이 드물었다고 했고, 어쨌거나 '비용을 받는 일'이니까.. 아무튼 가격을 책정하는 것부터, 상세페이지를 만들고, 리워드의 구성하는 것까지 모든 과정에 적지 않은 부담감이 있었다. 19만 9천 원이라는 비용이 너무 크게 다가왔다. 줄일 수 있는 건 다 줄이고 싶었다.


촬영 때 사용했던 제품들


결국 적자를 피할 수는 없었다. 수수료도, 부가세도, 심지어 화보집 택배비조차 생각하지 못했다. 20만 원 중에 수수료로 나가는 돈이 얼마고, 추후 세금이 얼마나 나오고, 결국 남는 건 얼마인데, 그런 종류의 계산기를 두드리지 못했다(이건 지금도 잘 못한다).


매거진 더뉴그레이 창간호

아무리 생각해도 무모했다. '촬영이야 우리가 하면 되니까, 바버샵도 운영하고 있으니까, 199,000원으로 화보집과 옷만 구하면 되니까..' 도대체 이런 무모한 생각을 그때의 형과 나는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나는 주말마다 이태원 클럽에서 바텐더를 하며 밤을 새 가면서 번 돈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형은 과외를 다섯 개 정도 뛰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기도 했다(사실 최근까지도 그랬다).


형과 나는 결국 그렇게 번 돈으로 아빠들 입힐 옷을 사고, 더뉴그레이 매거진 창간호 인쇄를 해냈다. 그야말로 백지 상태에서, 온몸으로 부딪혀서 만들어낸 첫번 째 성과였다. 그리고 '내가 하고자하는 일이 방향적으로 잘못되지 않았구나' 확신할 수 있었다.


(다음 편이,, 궁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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